
1792년부터 1815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은 프랑스가 직면한 가장 끈질긴 적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참여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측면이 있다면, 바로 평범한 국민 방위군의 활약입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제국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극도로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시민 무장 조직인 국민방위대 창설을 꺼린 주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카를 대공의 추진과 1808년 칙령
1805년 울름과 아우스터리츠에서의 참패 이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최고사령관이자 황제의 동생이었던 카를 대공은 국민방위대 창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관련 칙령은 1808년에 서명되었습니다.
칙령에 따라 오스트리아 각 주는 일정 수의 방위군 대대를 편성했습니다.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고 여러 징병 면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18세부터 45세까지의 남성은 누구나 등록 의무가 있었습니다.
편성과 훈련
방위군 대대는 육군 독일계 선발보병 부대를 본떠 편성되었으며, 이론상 800~1,200명의 병력을 보유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정원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750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장교들은 지역 귀족 출신이거나 예비역 장교·부사관들이 맡았습니다.
칙령에 따르면 방위군은 매년 21일간 훈련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훈련은 통상 중대 단위로 진행되었으며, 대원들은 거주하는 도시와 마을에서 매주 일요일 예배 후 광장에 모여 밀집대형 기동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무기와 장비
방위군의 장비는 낡은 것이었습니다. 주력 화기는 18.3mm 구경의 로트 6/4 머스킷으로, 육군에서는 이미 1798년까지 사용되던 구식 소총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1744년식 구형 머스킷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부사관은 머스킷 외에 짧은 검을, 장교는 검과 권총을 지녔습니다.
경비 절감과 탄약 부족으로 실사 사격 훈련은 드물게 이루어졌습니다. 훈련 과정에는 실탄 4발과 공포탄 6발 발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대원들이 무기의 폭음과 강한 반동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각 대대에는 30명 규모의 소대, 혹은 경우에 따라 중대 하나가 강선 소총으로 무장해 저격병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런 정예 무기는 대대 내 최우수 인원에게 지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 대대는 4~8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중대당 이론상 야전 병력은 150~200명이었습니다. 대대들은 여단에 배속되어 슈타이어마르크, 크란스카, 케른텐, 잘츠부르크, 트리에스테 지역에 총 34개 대대가 편성되었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는 총 55개 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복색과 복장
방위군은 육군과 비슷한 간소한 군복을 입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자들은 코트 하나만 걸치기도 했습니다. 군복 색깔은 대대가 편성된 지역에 따라 밝은 회색 또는 짙은 녹색이었으며, 하의도 회색이었습니다. 그 외 장비는 선발보병과 동일했습니다.
대원들은 흰색 또는 검은색 가죽 장비에 검은색 탄약통과 총검 집을 찼습니다. 총검은 보병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사관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병사를 다스리기 위한 나무 몽둥이도 휴대했습니다.
모자는 검은색 '코르시카풍' 모자를 썼지만, 농사일 때 쓰던 민간용 모자, 심지어 정장 재킷과 어울리는 반높이 모자를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부 자원 방위군 대대는 질 좋은 군복과 장비를 갖추었으며, 그 비용은 대원들이 스스로 부담했습니다.
1809년 전쟁과 라프 전투의 영웅들
1809년 대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10만 명의 방위군이 소집되었습니다. 방위군 대대들은 바그람 대전투에도 참전했지만, 특히 두각을 나타낸 곳은 라프 전투였습니다. 1809년 6월 14일 헝가리의 라프 강변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약 6,000명의 방위군은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이끄는 베테랑 부대를 상대로 훌륭하게 싸워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나폴레옹은 방위군 해체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1813년 새로운 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방위군은 재편성되었고, 각 선발보병 연대마다 하나의 대대가 제4대대로 배속되었습니다. 이들은 독일 전역에서 활약하며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1814년, 이름없는 오스트리아 방위군 병사들은 마침내 프랑스 본토로 진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