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3년,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쟁은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뛰어난 장군이자 훗날 샤가 된 나디르(Nadir)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튀르크(오스만)군을 상대로 수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한편으로는 오스만이 점령한 이라크 침공 시도에서 뼈아픈 패배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사마라의 굴욕, 그리고 재기
그러나 나디르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대를 신속히 재편성한 뒤 다시 북진하여 키르쿠크(Kirkuk) 인근에서 적과 조우했습니다. 그의 맞수는 다름 아닌 오스만의 명장 토팔 오스만(Topal Osman)이었습니다. 1732년 이라크 사마라(Samarra)에서 토팔에게 당한 참패는 오히려 나디르를 더욱 완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마라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끝까지 분전했으나, 오스만군의 사상자 2만 명에 비해 3만 명이라는 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패전 직후 나디르의 최우선 과제는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하고 부대를 재정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또 다른 문제가 터졌습니다. 페르시아 남부에서 무함마드 칸 발루흐(Muhammad Khan Baluch)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나디르는 고민 끝에 먼저 튀르크를 상대하고, 그다음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끼 작전으로 선봉대 궤멸
나디르가 키르쿠크로 진격하자, 이를 파악한 토팔은 메미스 파샤(Memis Pasha)가 지휘하는 1만 2천 명 규모의 선봉대를 앞세워 페르시아군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토팔의 총 병력은 10만 명, 나디르의 병력은 이보다 약간 적었습니다.
정찰병을 통해 적의 동향을 파악한 나디르는 적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하지 베그 칸(Haji Beg Khan)이 이끄는 부대를 일부러 '미끼'로 내보낸 것입니다. 메미스는 함정에 그대로 빠져 페르시아 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토팔에게 "페르시아군을 패주시켰으니 완전 섬멸을 위한 증원이 필요하다"는 보고까지 보냈습니다.
그러나 토팔이 보고를 접하는 동안, 메미스의 부대는 이미 3만 페르시아군에게 포위당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선봉대를 말살한 나디르는 즉시 전 병력을 이끌고 튀르크 본대로 진격했습니다.
결전의 순간: 좌우 포위 섬멸
이때 양군은 불과 5km 거리에 있었습니다. 사태의 이상을 직감한 토팔은 행렬을 멈추고 전투 대형을 갖추라고 명령했고, 나디르 역시 접근하는 동안 군대를 전투 대형으로 배치했습니다.
두 군대가 맞닥뜨리자 나디르는 보병에게 튀르크 중앙의 예니체리(Janissary)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페르시아 보병은 다가서며 두 시간 동안 예니체리를 향해 연속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이후 검을 뽑아 백병전에 돌입했습니다. 예니체리도 필사적으로 맞섰고, 전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치열해졌습니다.
바로 이때 나디르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각각 1만 5천 기병으로 구성된 두 개의 기병 군단을 튀르크군의 좌우 측면으로 돌격시켜 양익 포위를 감행한 것입니다. 곧 튀르크군은 공포에 질린 무질서한 무리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토팔은 병력을 수습하려 했으나 화포탄 두 발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고, 쓰러진 그의 목은 페르시아 병사의 칼에 의해 잘려 나디르에게 바쳐졌습니다.
대승의 주인공, 그러나 아쉬운 마무리
전투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튀르크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2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모든 대포를 상실했습니다. 반면 페르시아군의 손실은 미미했습니다. 나디르는 승자의 자격으로 토팔의 시신을 바그다드로 보내 예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승리 후 나디르의 눈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타브리즈(타우리스)로 진격하거나, 바그다드를 포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무함마드 칸의 반란 진압에 발목을 잡혀 어느 계획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 대승의 성과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나디르가 전쟁을 유리하게 종결짓기까지는 2년의 추가 전쟁이 더 필요했습니다. 아르메니아 예그바르드(Yegvard)에서 그는 단 1만 5천 명의 병력으로 5만 기병과 3만 보병으로 구성된 튀르크군을 격파하여 5만 명의 손실을 안겨주며, 마침내 전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마무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