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북방전쟁의 서막, 나르바
나르바 전투는 대북방전쟁(1700~1721)의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단독으로 거대한 러시아, 오랜 숙적 덴마크, 그리고 폴란드-작센 연합군과 맞서야 했다.
러시아 차르 표트르 대제는 아직 중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자국을 근대 유럽 열강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발트해를 장악한 강국 스웨덴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자국 군대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반(反)스웨덴 동맹에 가담했다. 1700년 표트르는 유럽식 기준에 따라 신규 보병 연대 31개를 창설했다. 하지만 군대란 제복과 행진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두 가지 승리의 무기: 정예부대와 젊은 왕
반면 스웨덴에는 두 가지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왕을 종교처럼 따르며 전장으로 나아가는 소규모 정예부대, 그리고 타고난 전사인 국왕 카를 12세였다.
카를은 15세에 즉위하여 남다른 군사적 재능을 드러냈다. 두려움을 모르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던 그는 적의 수적 우세와 포화에 굴하지 않았고, 같은 정신을 부하들에게도 불어넣었다.
18세의 왕, 나르바로 향하다
나르바 전투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훨씬 나이 많은 통치자라면 패배했을 상황에 놓였지만, 그는 순식간에 대응해 번개 같은 공격으로 덴마크를 전쟁에서 이탈시켰다.
서쪽이 정리되자 그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에스토니아에 상륙했다. 그곳의 상황도 절박했다. 유명한 페이푸스 호수 북쪽의 도시 나르바를 강력한 러시아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도시 수비대는 겨우 1,800명이었지만, 이를 포위한 러시아군은 37,000명을 넘었고 포 195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를이 모을 수 있었던 병력은 고작 10,500명과 대부분 경포인 포 37문뿐이었다. 그는 직접 이 소부대의 지휘를 맡았고, 베테랑 지휘관인 칼 구스타프 렌스키올드 중장과 오토 벨링 장군이 보좌했다.
러시아군의 총지휘는 차르가 맡았으나, 그는 전투 전날 진영을 떠나 프랑스계 독일인 칼 드 크루아와 안톤 골로빈, 이반 트루베츠코이, 아담 바이데, 보리스 셰레메토프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오늘날까지도 역사학자들은 표트르 차르가 떠난 이유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다수는 카를의 소수 병력이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증원병력과 함께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부는 비겁함을 비난하지만 아마 사실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투 전야의 차르의 이탈이 병사들의 사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표트르는 혼자가 아니라 부사령관인 페오도르 골로빈 원수와 함께 떠났다. 드 크루아는 지휘를 맡기를 원치 않았지만 차르의 압박에 못 이겨 받아들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러시아군은 세 개 사단으로 나뉘어 각각 골로빈, 트루베츠코이, 바이데가 지휘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나이 23살의 차르의 젊은 총애 인물로 군사 경험이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경험이 많은 셰레메토프는 보야르(귀족) 기병 등 비정규 부대를 지휘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 포병 역시 젊고 완전히 무경험한 차르의 총애 인물인 알렉산드르 이메레티 공이 지휘했다.
병력과 배치
1700년 11월 29일 저녁, 카를은 작은 부대를 이끌고 나르바에서 약 13km 떨어진 라게나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수비대가 아직 버티고 있는지, 아니면 도시가 이미 러시아에 항복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소하고 병사들의 사랑을 받던 젊은 스웨덴 국왕은 부대를 시찰하고 기병 정찰대를 파견해 상황을 확인했다. 도시가 아직 버티고 있다면 포성으로 신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포성 때문에 러시아군 역시 적이 접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즉시 드 크루아는 부대를 경계 태세에 넣었다. 러시아군은 밤새 절반의 병력을 대기시켰다. 날이 밝자 드 크루아는 도시 주변에 구축한 방어 해자와 진지를 따라 전군을 전투 배치했다.
병사들의 미숙함을 감안해 그는 어떤 연대도 스웨덴군이 15~20m 이내로 접근하기 전에는 발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한편 스웨덴군은 '고파(Gå På)', 즉 '적에게 덮친다'로 번역될 수 있는 매우 공격적인 전술 교리를 실천하고 있었다.
3분의 1이 롱 스피어로 무장한 스웨덴 보병은 적에게 돌진해 20m 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퍼붓고, 이어 창과 총검으로 백병전을 벌였다. 스웨덴군은 시편을 노래하며 진군했고, 전투 전에는 '주기도문'을 암송했다.
눈보라 속의 결전
다음 날 스웨덴군이 먼저 움직였다. 병사들은 러시아군이 진지 주변에 판 참호를 메우기 위한 장작 다발을 준비해 두었다. 러시아군은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드 크루아는 카를의 작은 군대를 보고 그것이 스웨덴군 선봉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카를이 다른 병력도 더 보유하고 있다고 믿은 그는, 셰레메토프가 제안한 참호를 빠져나와 평지에서 정면 대결하자는 안을 거절했다.
러시아군은 길이 6.5km에 달하는 두 개의 전투 진지선 사이에 전개되었다. 이런 배치 탓에 러시아군은 기동조차 할 수 없었다. 러시아 진형 중앙의 골든호프 언덕에는 강력한 요충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카를은 러시아 진형을 보고 요충지는 무시한 채 전선의 좌우 양익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각 방향마다 보병 대대 10개씩을 투입했다. 전위는 정예 척탄병들이 맡았다.
스웨덴 대대의 평균 병력은 고작 300명이었다. 약 4,500명의 기병은 보병의 측면을 엄호했는데, 주임무는 러시아군이 진지를 이탈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또한 스웨덴 포 37문은 포대 언덕에 배치되어 보병이 공격할 러시아 진형 내 사전에 선정된 지점을 포격했다.
전투
오후 2시, 스웨덴군의 준비가 끝나고 진격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순간 눈보라가 몰아쳤다. 공격 연기를 건의한 장교들을 무릅쓰고 카를은 이를 황금 같은 기회로 여겼다. '고파' 전술에 따라 스웨덴군은 백병전 거리까지 접근해 살육적인 일제 사격을 퍼붓고, 러시아군 첫 열을 쓸어버린 뒤 총검으로 돌진했다.
러시아군도 응사했지만 몇 분 만에 스웨덴군이 그들 곁으로 파고들었다. 잔혹한 학살이 벌어졌고, 러시아 전선의 양익은 무너졌다. 진형 중앙의 병력들은 싸울 수도, 후퇴할 수도, 기동할 수도 없었다.
혼돈과 공포가 번졌다. 러시아 병사들은 장교들, 특히 외국인 장교들을 살해하고 도주했다. 공포에 질린 러시아군은 진지 후방을 이루는 나로바 강의 다리를 건너려 했지만, 다리는 인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고 수천 명이 짓밟히거나 얼음장 같은 물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차르의 근위 연대 2개만이 끝까지 분전했다. 그들은 대형 방진을 이루고 스웨덴군을 막아섰다. 직접 돌격을 이끌었던 카를은 말이 쏘이는 바람에 요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무한정 버틸 수는 없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셰레메토프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장군들이 포로가 되었다. 전투는 소수의 스웨덴군과 그 뛰어난 지휘관의 대승리로 끝났다. 러시아군은 총 18,000명과 포 173문을 잃었다. 반면 스웨덴군의 피해는 전사 667명, 부상 1,247명에 그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카를은 이 승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혹독한 겨울과 폴란드·작센군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처지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긴 전쟁에 휘말렸고, 9년 후 폴타바에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승리한 스웨덴군의 손에 들린 러시아 군기 전리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