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이반 뇌제의 카잔 공성전: 러시아가 무슬림 타타르족을 정복하다

이반 뇌제의 카잔 공성전: 러시아가 무슬림 타타르족을 정복하다

카잔 타타르족은 아스트라한과 크림의 동족들과 함께 수 세기 동안 러시아의 최대 숙적이었다. 러시아를 약 200년간 지배했던 몽골 황금호르드(킵차크 칸국)의 후손인 그들은 정기적으로 러시아 영토를 습격하며 공포와 경악을 퍼뜨렸다.

15만 대군의 재도전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 역시 여러 차례 카잔 원정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1552년, 그는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무려 15만 명의 대군을 소집했다. 물론 이 중 전투원은 절반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포위전에 필요한 육체노동을 담당할 징집된 농노들이었다.

이에 맞선 카잔 측은 3만 명의 정예 기병을 내세웠고, 포위된 성 안의 건강한 남성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까지 모두 방어에 나섰다. 여기에 노가이(Nogai) 타타르족 2,700~3,200명도 합류해 함께 싸웠다.

폭우와 유격전, 이반의 해결책

카잔 공성전은 길어졌고, 이반에게는 문제가 산적했다. 잦은 폭우로 성 주변의 땅이 늪지대로 변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포위된 타타르족과 성 밖에 자리 잡은 노가이 타타르족은 끊임없이 러시아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반은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다. 첫 번째는 성십자가(聖十字架) 조각을 안치한 진영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올린 것인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비가 멈췄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는 카잔 인근 숲으로 피신한 노가이 타타르족을 격멸하고, 포위된 타타르족이 감행한 가장 크고 위험한 돌출 작전을 격퇴한 것이다.

8월 24일, 1만 5천의 대돌파

1552년 8월 24일, 1만 5천 명의 타타르군이 성벽을 빠져나와 포위군을 향해 돌진했다. 타타르군은 요란한 전투 함성과 끊임없는 화살 세례 속에 이반의 정예 보병부대인 스트렐치(Streltsy) 3천 명에게 맞섰다.

스트렐치는 전열을 갖추고 화망으로 적을 맞이했다. 수백 명의 타타르 병사들이 쓰러졌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아 용감하게 싸우는 스트렐치를 쉽게 수적으로 압도했다. 스트렐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적의 우세 앞에서 후퇴를 시작했으나, 막대한 손실에도 결속력을 잃지 않고 일종의 사각방진(方形陣)을 형성했다. 그리고 때때로 멈춰 서서 플레일과 검으로 타타르군과 교전을 벌였다.

차르의 반격: 망치와 모루

이반은 자신의 천막에서 전황을 지켜보다가 즉시 기병대에 반격을 명령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 Donskoi)의 군기 —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한 14세기 러시아 공작의 깃발 — 와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차르의 개인기를 앞세운 채, 이반은 중기병과 친위대를 이끌고 돌진하여 타타르군을 망치와 모루 사이에 몰아넣었다.

최후의 결전

타타르군의 패배는 참담했다. 피해가 너무 커서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돌출 시도를 감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공성전은 계속되었다. 9월이 저물었고, 무서운 러시아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이반은 하수도를 통해 성벽을 폭파하는 작전을 시도하기로 한다. 사실 그는 이미 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해 성벽에 구멍을 내고 도시의 급수를 차단한 바 있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치밀하게 준비했다.

10월 2일, 카잔 함락

10월 2일, 성벽 일부 아래로 파놓은 지하 통로를 폭파해 거대한 틈을 열자, 러시아군은 스트렐치를 선두로 카잔으로 진격했다. 타타르군은 성벽의 잔해 사이, 틈이 열린 지점에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스트렐치의 실력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

스트렐치는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침착함을 유지하며 전열을 정돈하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집결한 타타르군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매번 발포 후 몇 미터씩 전진하는 전술이었다. 타타르군의 반격 시도는 스트렐치의 끊임없는 화망 앞에서 번번이 좌절되었다.

마침내 타타르군의 사기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러시아군과 스트렐치는 일제히 틈새로 돌진했다. 몇 시간 후, 모든 저항이 멎었다. 카잔은 러시아의 것이 되었다. 이 승리는 러시아가 동방으로 판도를 확장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아스트라한(1556년)과 시베리아 정복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