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유 없는 초강대국, 독일의 딜레마
독일은 석유를 생산하지 못한다. 이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진실이다. 1939년 당시 독일은 석유 수요의 70%를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은 소련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제 석유 시장과의 연결고리를 잃었다. 유일하게 열려 있던 통로는 1939년 8월 리벤트로프-몰로토프 조약 체결로 확보한 소련 시장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크렘린이 결정만 내리면 언제든 공급이 끊길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소련산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도로 불편하게 느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석유는 1940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소련 침공 계획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독일군은 소련 석유 생산량의 약 70%가 코카서스 유전에서 나온다고 추산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정복하면 독일은 석유 확보라는 결정적 이점을 얻는 동시에, 적이 전쟁을 지속할 능력 자체를 박탈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A집단군과 B집단군 두 개의 집단군으로 나뉘어 공세에 나섰다.
기갑부대의 보급과 돈 강 도하
독일군의 여름 공세는 1942년 6월 28일 B집단군 작전 구역에서 시작되었고, 이 부대들은 보로네시와 돈 강 방면으로 진격했다. 돈 강 방어선은 서쪽에서 동쪽까지 소련 제12군, 제18군, 제37군, 제51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A집단군은 7월 9일 전투에 합류했으며, 폰 클라이스트 장군의 기갑부대가 소련 남부 전선의 우익을 공격하며 공세를 개시했다.
7월 20일, 제3기갑사단과 제23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제30기갑군단이 돈 강에 접근했다. 제23기갑사단의 한 전투단이 니콜라옙스카 인근 강 북안에 도달했다. 샤이트리크 공병 소령이 지휘한 이 부대는 제23군단 정찰여단, 공병중대, 장갑척탄병중대, 포병중대 2개로 편성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완전히 기습하는 데 성공했고, 곧 일부 병력이 이 지점에서 폭 150m에 달하는 강 동안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해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수상 방어선 중 하나가 소련군 손에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이 구역을 방어하던 니콜라이 트루파노프 소장의 소련 제51군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수의 독일군에 대한 역공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참패 뒤 지휘관은 해임되었지만 이미 피해는 되돌릴 수 없었다. 게다가 교체 과정이 지나치게 성급하게 진행되어, 위기의 며칠 동안 제51군은 사령관 없이 움직여야 했다.
독일 공병들은 페리 시설을 구축했고, 7월 22일 저녁부터 독일군 경장비들이 대안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23기갑사단은 연료 부족으로 이 성과를 즉시 활용하지 못했다. 이에 교두보 증원 임무는 제3기갑사단 소속 전술 부대에 맡겨졌는데, 이 부대는 과감히 적진 40km 깊숙이 진입해 돈 강 남쪽 오를로프카 인근 살 강 위의 다리를 온전한 상태로 확보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7월 23일에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이 말리놉스카야 지역에서 돈 강을 건넜다. 맞은편의 소련 제37군 역시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군이 독일군 전초기지에 처음으로 역공을 시도한 것은 7월 25일에 이르러서였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소련 전선 우익의 지칠 대로 지친 군들은 상당량의 포병 화력마저 버리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로스토프 함락과 최초의 소련군 역공
소련 제51군은 살 강의 독일군 교두보 맞은편에 소총 3개 사단을 전개하고, 보유한 몇 안 되는 전차로 독일군 우익 타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T-60 경전차는 베테랑 독일 전차병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고 소련군의 역공은 손쉽게 격퇴되었다. 다만 소련 항공부대는 독일 공병들이 강 위에 설치한 가교를 파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코카서스로 향하는 진격에 성공하려면 로스토프와 그 남쪽의 돈 강 교량들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제57기갑군단은 불타는 로스토프 시내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군단장 폰 키르히너 장군은 교량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제13기갑사단에 교량 확보 즉시 신속히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7월 23일 16시, 사단의 정찰 부대가 돈 강 북안에 도착했고, 마주한 소련군은 거의 무질서한 상태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두 개의 교량이 파괴된 상황(그중 하나는 독일군의 실수로 인한 것이었다)에도 불구하고, 제13기갑사단의 공병들은 1942년 7월 23~24일 밤 사이 부교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더 북쪽에서는 독일 제17군의 보병 사단들이 로스토프 지역을 소탕하고 있었다.
로스토프 남쪽 돈 강 교두보를 활용하기 위해 독일군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목표물이 있었다. 바로 길이 6km에 달하는 제방 위의 고가 도로였다. 로스토프 남쪽 바타이스크 일대에는 이 도로와 평행하게 도로교와 철도교 등 다리 5개가 놓여 있었고, 교량 시설 옆에는 통행을 가로막는 광대한 습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은 로스토프에서 갓 후퇴해 온 소련 제18군 예하 부대들이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전력이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특히 교량 구역은 제339소총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제방을 기관총과 박격포로 빈틈없이 엄호했지만, 정작 다리를 미리 폭파하거나 지뢰를 매설하지는 않았다.
정면 돌파는 처음부터 성공이 어려워 보였지만, 명성 높은 '브란덴부르크' 특수부대 소속의 그라베르트 중위는 이 작전을 감행하기로 한다. 7월 25일 새벽, 젊은 지휘관의 부하들은 기습을 무기로 삼아 용감하게 돌진했다. 대담한 독일군들은 새벽 4시경 다섯 개 다리 중 두 번째 다리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부대는 고립되었고 지휘관 그라베르트 중위는 치명상을 입었지만, 루프트바페 슈투카의 등장이 소련군 방어진지를 파괴하며 마침내 제13기갑사단 전차부대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제방 공격으로 '브란덴부르크' 분견대는 전사·실종 33명, 부상 54명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그 희생 덕분에 코카서스로 통하는 관문이 마침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