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5월, 북아프리카의 전운
1942년 5월, 북아프리카 전역의 상황은 추축국에게 유리하게 기울고 있었다. 베를린과 로마는 에르빈 롬멜 장군에게 공세를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결정에 따라 작전 계획 수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 정보 당국은 이번에는 가잘라–비르 하켐 방어선에 배치된 영국군의 정확한 병력 배치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아프리카 군단의 정찰 부대마저 대응하는 영국군 정찰대에 의해 임무 수행을 방해받았다.
강화되는 영국군 방어선
같은 시기, 영국군은 해당 지역의 방어 진지를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방어선 중앙에는 광대한 지뢰밭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의 경계 임무는 독일군의 주목에서 완전히 벗어난 영국 제150여단이 맡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비르 하켐 요새가 자유 프랑스 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 여단에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외인부대 소속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방어진의 우익은 증강된 제1남아공사단이 담당했다. 또한 토브룩 서쪽에는 방어선 병력들의 보급을 담당하는 거대한 보급기지(베이스 4)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기지를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필요성은 결국 영국군 작전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군단의 전력
한편 아프리카 군단 역시 상당히 증강된 상태였다. 1942년 5월 말 기준으로 아프리카 군단은 332대의 3호 전차(Pz III)와 4호 전차(Pz IV)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3호 전차는 50mm 42구경장 포를 장착했지만, 제21기갑사단에 배속된 19대는 우수한 50mm 60구경장 포를 갖추고 있었다.
4호 전차는 4대를 제외하고 모두 단포신 75mm 24구경장 포를 탑재했다. 나머지 4대는 장포신 75mm 포를 장착했으나, 적합한 탄약 부족으로 전투 초기 단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독일 기갑부대와 함께 싸울 이탈리아 전차는 약 230대로, 주로 M13/40과 M14/41이었으며, 75mm 포를 장착한 셀모벤테(Semovente) 돌격포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프리카 군단은 또한 48문의 88mm 포와 상당수의 76mm 대전차포로도 증강되었다.
영국군 역시 대폭 증강되었다. 무엇보다 제8군 사상 처음으로 독일 기갑 전차들과 맞서 생존을 기대할 수 있는 전차를 확보한 것이다. 미제 M3 그랜트/리 전차 240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작전명 '베네치아'
증강을 마친 롬멜은 최후의 결정적 일격을 가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영국군의 가잘라–비르 하켐 방어선을 분쇄하기 위한 작전 '베네치아(Venezia)'가 바로 이러한 판단 아래 수립되었다. 롬멜의 계획은 단순했으며, 다가올 전투에서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될 아프리카 군단의 규율과 투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발터 네링(Walther Nehring) 장군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군단의 3개 사단은 영국군 좌익에 대한 대규모 우회 기동을 실시하여 비르 하켐을 돌파하고, 영국군 주 저항선의 병력을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동시에 이탈리아 제20기동군단은 비르 하켐을 공격하고, 독일 제90경사단 일부로 증강된 이탈리아 제10군단과 제21군단은 크루웰(Crüwell) 장군의 총지휘 아래 가잘라 방어선에 대한 양동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남부 전구의 독일 제90경사단에는 항공기 엔진을 장착한 특수 개조 트럭이 배치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최대한 많은 먼지를 일으켜 영국군이 자신들이 나타내는 위협의 규모와 성격에 대해 오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롬멜은 특수 트럭을 갖춘 제90경사단에게 비르 하켐 남동쪽, 완전히 사막 깊숙이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통해 영국군이 독일군의 포위 기동이 실제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도록 유도한 것이다.
포위당한 공격자… 탈출과 반격
5월 26일 저녁, 롬멜의 1만 대의 차량과 약 8만 명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해 다음 날 아침을 위한 전진 진지를 점령했다. 폰 멜렌틴(von Mellenthin)의 표현대로 "잘 기름칠된 기계"처럼 아프리카 군단은 마지막 세부 사항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동이 트자 '베네치아' 작전이 개시되었다.
아프리카 군단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전진하여 비르 하켐을 돌파했고, 이 요새는 이탈리아 기갑사단 아리에테(Ariete)가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탈리아군은 기세 좋게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 요새를 지키던 외인부대의 노련한 병사들에게 격퇴되었다.
같은 시각 아프리카 군단의 두 기갑사단은 영국 제7기갑사단 및 제4인도사단과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 전차들은 처음으로 제7사단의 그랜트 전차들과 마주쳤고, 적의 약점을 발견하기 전까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제15·제21기갑사단이 손실을 입은 것과 달리, 영국 사단들은 사실상 붕괴 직전에 몰렸다.
특히 제4인도사단은 와해된 채 전투에서 이탈했고, 제7기갑사단 역시 귀중한 그랜트 전차 다수가 산산조각 났다. 그럼에도 제7사단은 진지를 사수했고, 롬멜은 적 주 방어선을 포위하는 데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과도하게 늘어진 아프리카 군단은 연료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제15기갑사단은 정지했고, 롬멜은 제21기갑사단만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영국군 주 저항선 남쪽의 요충지인 나이츠브리지(Knightsbridge)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이제 아프리카 군단은 차단되어 궤멸될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했다. 본질적으로 롬멜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요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정면에서 영국군과 '정석적인' 전투를 벌이는 동안, 그와 그의 '아이들'은 적 후방 깊숙이 관통하여 제2선 영국군 부대들을 상대로 역전(逆戰)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군단은 동맹국의 도움과 장교들의 경험 덕분에 구원받았다. 5월 28일과 29일, 아프리카 군단은 나이츠브리지에서 공격해 온 모든 영국군 부대와 교전하여 격파했다. 동시에 트리에스테(Trieste) 사단의 이탈리아군은 영국군 지뢰밭을 가로지르는 넓은 통로를 열어, 그때까지 적 후방에서 고립되어 있던 아프리카 군단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구원의 길은 흔히 생각하듯 지친 병력을 철수시키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롬멜은 이 통로를 아프리카 군단의 보급로로 활용하여 공세 기동을 계속했다! 롬멜 자신도 큰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연료 호송대를 직접 인솔하여 고립된 기갑사단들에 재보급했다. 이후 영국군의 지뢰밭을 방어적으로 활용하며 아프리카 군단에 반원형 진형을 명령하여, 영국군의 어떤 공격도 분쇄했다.
회복을 마친 아프리카 군단은 다시 전투를 이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첫 번째 목표는 지뢰밭 안에서 군단의 좌익을 위협하던 영국 제150여단을 섬멸하고, 비르 하켐을 점령하여 적의 좌익을 영구히 분쇄하는 것이었다. 제150여단은 제15·제21기갑사단의 집중 공격에 맞서 72시간 동안 영웅적으로 진지를 사수했으나, 끝내 궤멸되고 말았다.
이로써 롬멜은 마침내 적의 저항선을 돌파하고 영국군 지뢰밭을 가로지르는 넓은 통로를 열었다. 이 통로를 통해 연료와 탄약, 보급품이 고립된 부대에 도달했다. 그러나 승리는 대가 없이 오지 않았다. 아프리카 군단의 두 기갑사단은 전차 전력의 약 50%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군단은 6월 5일 영국군이 감행한 새로운 반격을 특유의 여유로 물리쳤다. 공격 선두에 섰던 영국 제32기갑여단은 보유 70대 중 58대의 전차를 잃고 철수를 강요당했다. 이를 지원한 제9·제10인도여단과 제22기갑여단의 운명은 더욱 처참했다. 이 부대들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되었다. 세 개 여단 가운데 생환한 영국 장교는 단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과 함께 약 5,000명의 영국·인도 병사가 사살 또는 포획되었다.
전선 남쪽 끝에서는 정찰 부대로 증강된 제90경사단의 개입으로 6월 10일 비르 하켐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용감한 수비대는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