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외인부대는 프랑스 왕실의 잉여 용병들과 유럽 사회 구석에서 몰려온 인간들로 창설되었다. 이들은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어 광신적인 무슬림 에미르들과 처음으로 정면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곧 새로운 전쟁터, 그것도 시민전쟁이 한창인 뜨거운 스페인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구대륙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분쟁 중 하나로 기록된 제1차 카를리스트 전쟁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수호하는 임무였다.
왕실 칙령, 외인부대의 스페인 귀속
1835년 6월 28일, 왕실 칙령에 따라 외인부대는 스페인 육군에 넘겨졌다. 다음 날 반포된 새 칙령은 외인부대가 더 이상 프랑스 군대가 아니라 스페인 군대의 일부임을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상당히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프랑스는 스페인에 대한 동맹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프랑스인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누구도 프랑스가 스페인 내전에 개입했다고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외인부대 지휘관 조제프 베르네(Joseph Bernay) 대령은 1835년 8월 17일 부하들을 이끌고 타라고나에 상륙했다.
첫 대규모 교전, 스위스 중사 베르세의 활약
1836년 3월 24일, 외인부대는 스페인 땅에서 첫 대규모 전투를 치렀다. 그날 아침 제4대대는 툼비리 너머의 고지를 점령하여 병력이 계곡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받았다. 대대는 거센 눈보라 속을 행군하고 있었고, 시야는 크게 좁아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선두 중대가 카를리스트 기병들의 기습을 받았다. 놀란 외인부대원들은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스위스 출신 베르세(Berset) 중사의 용기가 중대를 구해냈다. 이미 20곳의 상처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하들을 성공적으로 재정비하여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카를리스트들은 대규모 병력과 함께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제4대대 전체를 위협했다. 다행히 베르네 대령은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즉시 제5대대에 카를리스트 역공을 명령했다. 이번에는 오히려 반군 쪽이 기습을 당한 형국이 되어 도주했고, 전장에 시신 170구와 포로 30명을 남겨 두었다. 만약 외인부대의 호위를 맡았던 스페인 부대들이 감히 전투에 참여했다면 카를리스트들은 완전히 섬멸되었을 것이다.
잔혹한 전쟁, 보복과 비극
외인부대 측의 피해는 전사 40명, 부상 32명이었다. 양측 모두 사망자가 많은 것은 포로를 잘 생포하지 않는 관행 때문이었다. 실제로 베르네 대령은 전장을 살피던 중 너무나 참혹하게 훼손된 외인부대원 다섯 명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카를리스트 포로 30명의 처형을 명령했고, 이 결정은 프랑스 본국에서 거센 항의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공포와 잔혹함이 하나의 전통이었다. 1836년 4월의 한 작전에서 외인부대원들은 카를리스트 진영을 기습해 동료 두 명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들은 입술이 잘리고 뺨이 칼로 찢기고 눈이 적출되며 두개골의 피부마저 벗겨져 있는 참상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불쌍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베르네는 파리에 이렇게 보고했다. 그러나 파리는 오히려 포로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를 요구했다. 4월 25일, 대포 4문을 운용하던 800명의 외인부대원들이 3,500명의 카를리스트에게 공격받았다. 전투는 종일 이어졌고, 마침내 베르네가 이끄는 외인부대원들은 전사자 20명을 남기고 후퇴했지만 부상자 70명은 끝까지 데리고 나왔다. 카를리스트 측은 사망 80명, 부상 200명의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