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독일의 폴란드 침공: 희귀 영상으로 보는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독일의 폴란드 침공: 희귀 영상으로 보는 1939년 9월 1일

1939년 9월 1일, 독일 육군이 폴란드 국경을 돌파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통되던 견해와 달리, 폴란드와 서방 동맹국(영국, 프랑스)을 상대로 한 독일 육군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결코 우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이 앞선 유일한 분야는 전술과 공중 전력뿐이었고, 그들은 적의 약점과 미흡한 협동 작전을 교묘히 활용해 적군을 차례차례 격파해 나갔습니다.

히틀러의 무모한 선택: 텅 빈 서부 국경

히틀러가 폴란드를 향해 병력을 집결시킬 때, 그는 최대한의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약 100개 사단 규모의 프랑스 육군 주력을 상대로 서부 국경 방어는 단 44개 보병사단(그중 20개는 예비 사단)만 남겨둔 것입니다. 한편 폴란드 육군은 보병사단 30개, 예비 보병사단 9개, 기병여단 11개, 산악보병여단 3개를 보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던 영국군 사단 최소 4개를 더해야 합니다.

숫자로 보는 양측 전력

이에 맞선 독일 육군은 각종 사단 약 110개를 보유했으며, 그중 장갑사단 6개, 경사단 4개, 자동차화사단 6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전차는 2,500대를 넘지 않았고, 그 대다수는 경전차였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 육군은 거의 3,500대의 전차(역시 대부분 경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독일 병사들이 폴란드 국경을 넘던 바로 그 순간, 프랑스 장성들이 현역 부대만으로(약 40개 사단)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다면 전쟁의 결말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통일된 지휘 없이 하나둘 무너져 내렸습니다. 폴란드 장성들 역시 방어 거점 선정 과정에서 비극적인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고, 적을 치명적으로 과소평가했습니다.

2,800km 국경을 지키지 못한 폴란드군

강력한 공군도, 많고 강력한 전차도 없이는 폴란드 육군이 독일과 맞닿은 2,800km에 달하는 국경 전역에 걸쳐 벌어질 방어전을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앞날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폴란드 장성들은 낙관적으로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적의 공격이 보여준 속도와 맹렬함에 첫 순간부터 놀란 폴란드 육군은 전체 동원조차 마치지 못했습니다. 1939년 9월 1일 당시 전투 준비를 마친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겨우 17개 사단과 4개 여단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진 채 고립된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독일군의 작전 개요: 두 개의 집단군

폴란드 침공을 위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두 개의 집단군을 전장에 투입했습니다. 남쪽의 더 강력한 A집단군은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지휘 아래 슐레지엔(실레시아) 지역의 독일-폴란드 국경에 배치되었습니다. 폰 보크가 지휘하는 B집단군은 동프로이센과 포메른 두 지역에 전개되었습니다. 작전 전체는 제1·제4 항공함대(Luftflotte)의 공중 지원을 받았으며, A집단군에는 리스트가 이끄는 제14군, 폰 라이헤나우가 이끄는 제10군, 블라스코비츠가 이끄는 제8군 등 세 개 군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주공을 담당한 제10군

제10군은 장갑사단 4개, 경사단 3개, 자동차화사단 2개를 포함해 총 15개 사단을 보유했습니다. 이 부대는 제8군과 협동하여 폴란드군의 중심(우치군과 크라쿠프군)을 분쇄하는 전략적 돌파 부대, 즉 '충각'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14군은 카르파티아 산맥 가장자리를 따라 펼쳐진 폴란드군의 저항을 소탕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A집단군은 예비로 보병사단 5개를 확보해 두었고, 이후 폰 클라이스트의 제22 기갑군단과 산악보병사단 2개가 추가로 배속되었습니다.

측면 포위를 노린 B집단군

B집단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지만, 병력 배치 방식 덕분에 폴란드군을 측면에서 포위할 수 있는 형태로 편성되었습니다. 포메른에서는 구데리안의 제19 기갑군단이 선봉에 선 폰 클루게의 제4군이 단치히 회랑 지역의 폴란드 방어선을 돌파한 뒤, 퀴클러가 지휘하는 동프로이센의 제3군과 합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공군의 지원 아래 독일 육군은 공세에 나섰고, 새로운 전술인 '블리츠크리크(전격전)'를 처음으로 실전에 적용했습니다. 과도하게 길게 늘어선 폴란드군은 헤아릴 수 없는 영웅적 용기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7일 만에 기울어진 승부

포메른의 폴란드군(보르트노프스키 장군)은 치명타를 입었고, 포즈난군(쿠트셰바 장군)은 포위당했습니다. 남쪽에서는 크라쿠프군마저 분쇄되었고 우치군은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캠페인 개시 불과 7일 만에 승부는 이미 독일군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폴란드군은 성공 가능성이 없는 일련의 포위망 안에 갇힌 채 그럼에도 영웅적인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소련의 배신, 그리고 종언

폴란드 기병과 보병은 진격하는 독일 기계화 부대의 속도에 필적할 만큼 빠르게 후퇴할 수 없었습니다. 폴란드군이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든 곳곳에서 적과 마주쳤습니다. 독일 공군(Luftwaffe)의 폭격에 시달리고 독일 육군에게 목을 조이던 폴란드는 9월 17일, 비겁한 소련의 공세라는 불필요한 일격까지 받고 맙니다. 이것이 끝이었습니다.

전쟁의 결과와 희생자

전투는 1939년 10월까지, 무장 저항은 1940년 겨울까지 이어졌지만, 독일 입장에서 승부는 이미 결정된 후였습니다. 이것은 전쟁 최초의 전격전 캠페인으로, 제공권과 전술적 우위, 기동성을 지닌 쪽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폴란드 캠페인에서 독일 육군은 10,572명이 전사하고 3,409명이 실종되며 30,332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이는 2개 반 사단 분의 인력에 해당하는 손실이었습니다. 반면 폴란드는 60,000명이 전사하고 180,000명이 부상당했으며, 거의 80만 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폴란드 침공은 이후 6년간 유럽을 휩쓸 참화의 서막을 여는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