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9년 빈 공방전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절세 군주'라 불린 술레이만은 '황금 사과'라 불리던 빈을 정복하고 이슬람을 유럽의 심장부로 확산시키려는 야망을 접지 않았다.
12만 대군의 재침공과 예상치 못한 발목
술레이만은 1532년, 무려 12만에 달하는 대군을 직접 이끌고 다시 북상했다. 크로아티아의 드라바 강을 건넌 그는 기존의 빈행 진로 대신 페르디난트 대공이 다스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 방면으로 진격로를 돌렸다.
오스만군이 행군 도중 지나친 곳곳의 작은 마을과 요새 17곳이 함락되며 죽음과 공포가 사방으로 번졌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정면 대결을 피해 급히 후퇴했고, 작은 방벽도시 귄스(오늘날 헝가리 쾨세그)에는 겨우 700명의 수비대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역사는 여기서 뜻밖의 흐름을 만들었다. 이 소규모 수비대가 오스만 대군의 발목을 놀랍도록 오래 잡아당긴 것이다. 술레이만은 이 작은 요새 도시 하나 앞에서 무려 25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약탈 기병 아킨지의 폭주
3년 전인 1529년 빈 성벽 앞에서 맛본 씁쓸한 기억까지 겹치자, 술레이만은 결국 굴욕적인 철수를 결심한다.
문제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술탄은 진격 과정에서 이미 카짐 베이(Kazım Bey) 휘하의 경기병 8천 명을 선봉대로 파견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광신적이고 약탈에 눈이 먼 이들, 이른바 '아킨지(Akıncı)'는 파라오의 상처에서 날아든 재앙처럼 슈티리아 방면으로 내달렸다.
그들은 빈 근처의 비너노이슈타트와 하오스트리아 일대까지 닿아 살육과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오스만 약탈병들은 어떤 것도 존중하지 않았다.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창에 꿰어 올렸으며, 여성들은 남편과 가족이 보는 앞에서 끌려나와 검으로 살해당했다.
이런 만행의 흔적은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너무나 처참한 기억으로 남았고, 그 상흔은 오늘날까지도 지역의 구전과 전승 속에 되살아난다.
죽음의 덫 — 세 갈래 탈출로의 함정
그러나 술레이만이 본대와 함께 철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된다. 학살을 자행하던 이 약탈 기병들은 어느덧 본대와 단절된 채, 복수에 목말라 있는 주민들이 가득한 적의 영토 한복판에 홀로 고립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당국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살육자들을 완전히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만군에게는 세 개의 탈출로가 열려 있었지만, 세바스티안 폰 부르텐바흐(Sebastian von Burtenbach)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그중 두 갈래를 참호와 강력한 수비대로 봉쇄했다. 카짐 베이는 선택의 여지 없이 빈 남서쪽의 레오버스도르프(Leobersdorf)로 향하는 세 번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아닌 학살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따뜻한 환영이 아니라 완벽하게 짜인 죽음의 덫이었다. 1532년 9월 19일, 팔츠 현작 프리드리히 '현명공', 오스트리아 장군 요한 카치아너(Johann Katzianer), 헝가리 귀족 발린트 터럭(Bálint Török)의 지휘 아래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 2만 2천 명(보병 2만, 기병 2천)이 레오버스도르프에 전개를 마친 것이다.
이후 벌어진 것은 전투라 부를 수도 없는 처절한 학살이었다. 오스트리아-독일 연합군은 단 한 명의 포로도 잡지 않았다. 목숨을 구걸하며 항복하려는 오스만 병사들조차 조금의 자비도 없이 베어 넘어졌다.
8천 명의 약탈 기병 중 살아남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카짐 베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은 술레이만에게 울려 퍼진, 피로 쓴 거센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