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사랄라 데비 차우두라니(Sarala Devi Chaudhurani): 인도 최초 여성 단체를 세운 여아 교육 운동가

페미니스트이자 반식민지 운동가였던 사랄라 데비 차우두라니(Sarala Devi Chaudhurani, 1872~1945)는 1910년 인도 최초의 여성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녀의 핵심 목표는 여아 교육의 확산이었습니다.

지식인 가문에서 태어난 딸

사랄라 고살(Sarala Ghosal)은 1872년 9월 9일 인도 콜카타(당시 캘커타) 북부의 부유한 동네인 조라산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과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어머니 스와르나쿠마리 데비(Swarnakumari Devi)는 저명한 작가이자 시인, 소설가, 음악가였으며, 철학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Debendranath Tagore)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 자나키나트 고살(Janakinath Ghosal)은 인도 국민회의 초대 간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랄라는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인도에서 성장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세포이 항쟁이라 불리는 독립 전쟁으로 크게 요동친 직후였고, 이 전쟁에서 라니 락슈미 바이가 특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대규모 항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민족 의식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싹트고 점차 커져갔습니다.

문예지 '바라티'

사랄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교육받은 여성이었습니다. 1890년 콜카타 대학교 산하 여자대학인 베튠 칼리지(Bethune College)에서 영문학 학위를 받았으며, 최우수 학생에게 수여되는 파드마바티 금메달(Padmavati Gold Medal)을 받을 만큼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영문학 외에도 페르시아어, 프랑스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했고, 시와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졸업 후 사랄라는 당시 마이소르 주로 이주해 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지만, 1년 만에 콜카타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삼촌인 조티린드라나트 타고르(Jyotirindranath Tagore)와 드비젠드라나트 타고르(Dwijendranath Tagore)가 창간하고 편집하던 신문 '바라티(Bharati)'에서 일하게 됩니다. 1895년부터는 어머니와 자매 히론모이(Hironmoyee)와 함께 일했고, 1899년부터 1907년까지는 단독으로 편집을 맡았습니다. 문학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애국심과 싹트던 정치적 신념까지 잡지에 녹여냈습니다.

운동가의 길

한편 사랄라는 인도 국민회의를 위한 노래를 직접 짓고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1901년에는 이러한 활동 속에서 인도 독립의 상징적인 지도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 지속되는 우정이 맺어졌고, 사랄라는 간디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애국자이자 인도 독립을 지지했던 사랄라는 동시에 여성 권리, 특히 교육권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1904년에는 콜카타에 락슈미르반다르(Lakshmir Bhandar)라는 상점을 열어 지역 여성들의 수공예품을 알리고 판로를 넓혔습니다.

1905년, 가족들의 압력 속에 사랄라는 변호사이자 언론인, 민족주의 지도자인 람부즈 더트 차우다리(Rambhuj Dutt Chaudhary)와 결혼하고 이름을 사랄라 데비 차우두라니로 바꾸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아들 디팍(Dipak)이 태어났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펀자브로 이주하여 남편과 함께 우르두어 잡지 '힌두스탄(Hindusthan)'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바라트 스트리 마하만달(Bharat Stree Mahamandal)

1910년, 사랄라 데비 차우두라니는 '바라트 스트리 마하만달', 즉 "전 인도 여성 기구"를 설립합니다. 이 단체는 인도 최초의 여성 협회로 평가받습니다. 단체의 핵심 목표는 그녀가 평생 가장 소중히 여긴 과제, 즉 인도 여아와 여성 교육의 진흥, 발전, 개선이었습니다.

사랄라는 이 협회를 통해 모든 인도 여성을 옹호하고 하나로 묶고자 했습니다. 조직의 지부는 라호르와 카라치(현재 파키스탄 영토), 델리, 콜카타, 하자리바그, 칸푸르 등 전국 여러 도시에 세워졌습니다. 회비는 1루피에 불과했고, 카스트와 무관하게 모든 여성에게 개방되었습니다.

말년의 헌신

남편 람부즈가 1923년 세상을 떠나자, 사랄라 데비 차우두라니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콜카타로 돌아왔습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는 잡지 '바라티'의 편집 업무를 다시 맡았습니다. 1930년에는 여성 교육에 대한 헌신을 한층 더 깊이하여 콜카타에 여학교 '바라트 스트리 시크샤 사단(Bharat Stree Shiksa Sadan)'을 설립했습니다.

사랄라는 63세였던 1935년 공적 생활에서 물러났고, 10년 뒤인 1945년 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도가 독립을 이루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