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A. 오드리아 아모레티(Manuel A. Odría Amoretti, 1897~1974)는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페루 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입니다. 그는 1897년 11월 26일 후닌(Junín) 지역의 타르마(Tarma)에서 아르투로 오드리아 알바레스(Arturo Odría Álvarez)와 소일라 아모레티(Zoila Amoretti)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의 산라몬 국립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1914년 리마로 이주하여 초리요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919년 동기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명예 검을 수여받으며 졸업했습니다. 1924년 대위로 진급한 그는 사관학교에서 군사 교관으로 재직했으며,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육군대학(Escuela Superior de Guerra)에서 전문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1930년 소령으로 임명된 그는 1936년 진급할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보병대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이후 쿠스코 제4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직책으로 피우라 경보병사단으로 옮겨 1941년 에콰도르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사루미야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1942년 대령으로 진급해 육군대학 교장을 맡았고, 고급 군사 과정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뒤 귀국하여 1946년 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정부 내 주요 직위
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 이 리베로(José Luis Bustamante y Rivero) 정부 시절(1945~1948) 오드리아는 정부·경찰부 장관을 역임하며 APRA(아메리카 인민혁명동맹) 세력의 격렬한 반발과 의회 발의 무효화 위기라는 어려운 정치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부스타만테 정부의 환율 통제에 반대하고 APRA를 적대시하던 수출형 농광업 부문의 지원을 등에 업은 그는 1948년 10월 27일 아레키파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부 위원회를 수립하고 부스타만테를 추방했습니다. 위원회는 처음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체계적으로 유린하며 정치 활동을 질식시켰습니다. 가정이 불법 침입을 당하고 다수의 APRA 및 공산당 정치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추방되었으며, '공화국 국내 안전법'이 제정되어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기본권이 정지되었습니다. 군사정부는 이러한 방식으로 1950년까지 통치했고, 같은 해 오드리아는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군정에서 물러나 행정권을 헤네론 노리에가(Zenón Noriega) 장군에게 위임했습니다.
오드리아 정부의 집권과 개혁
정당의 출마 금지와 유일한 경쟁자였던 에르네스토 몽타녜(Ernesto Montagne)의 투옥이라는 수순을 거쳐 오드리아는 1950년 헌법상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권력 강화를 위한 강압적 통치는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말에 앞선다"는 슬로건 아래, 한국전쟁으로 인한 호황적인 수출 상황에 힘입어 그는 대규모 공공사업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여기에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피우라 계곡을 비롯한 연안 지역 관개 사업, 서던페루 구리공사(Southern Peru Copper Corporation)를 통한 토페팔라 광산의 구리 생산 확대, 교육부·재무부·보건부·교통통신부 청사와 새로운 국립경기장 건설에 따른 건설업 호황, 직원·군인·해군 병원과 전국 각지의 대규모 학교 단지 건설 등이 포함됩니다.
한편 군대는 신식 무기 도입으로 현대화되었고, 고급군사연구센터(CAEM)가 설립되었으며, 군사사법법과 광업법이 반포되었습니다. 직원 사회보험과 노동·원주민 문제부가 신설되었고, 일요일 임금 지급권과 근로자의 기업 이익 배분권을 명문화한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페루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는 등 폭넓은 조치들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기 말기에 경제 위기가 재현되면서 식량 부족과 물가 상승이 나타났고, 야당은 이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정권은 강경책, 투옥, 박해로 대응했지만 이미 상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집권 연장을 희망하던 오드리아조차 1956년 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APRA의 지지를 받은 마누엘 프라도 우가르테체(Manuel Prado Ugarteche)가 승리했습니다.
오드리아 국민연합(UNO) 창당과 말년
정권에서 물러난 오드리아는 건강 회복과 휴양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귀국한 1961년에는 정치단체 '오드리아 국민연합(Unión Nacional Odriísta, UNO)'을 창당하고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Fernando Belaúnde Terry)와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Víctor Raúl Haya de la Torre)와 경쟁하기 위해 1962년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아야 데 라 토레가 승리했지만 군부는 선거 과정의 부정을 이유로 결과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오드리아는 이듬해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페르난도 벨라운데에게 패배했습니다. 벨라운데 제1기 정부 시절(1963~1968) 오드리아 장군의 당은 APRA와 의회 연합을 결성하여 벨라운데와 그의 인민행동당(Acción Popular)이 추진하는 구조 개혁을 가로막았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교착 상태는 행정부의 실효성을 무력화시켰고, 결국 1968년 10월 3일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Juan Velasco Alvarado) 장군의 군사 쿠데타를 촉발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정계 은퇴 후 오드리아는 1974년 2월 16일 리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