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공 볼레스와프는 왜 성인이 되지 못했을까?
기독교의 수용은 중세 통치자들이 서유럽의 정치 질서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종종 대관식에 따른 위상까지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교도 군주들이 조상의 신앙을 버리고 새 신앙을 받아들인 데에는 정치적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통에 따르면 나라에 기독교를 가져다준 통치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성(聖) 볼레스와프 용맹공'이나 '성 미에슈코 1세'를 선포하지 않았을까?
헝가리의 국왕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보헤미아의 공작 바츨라프 역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루스에서는 교회가 블라디미르 대공을 성인으로 올렸다. 볼레스와프 용맹공과 같은 시대에는 노르웨이의 기독교화를 이끈 성 올라프 2세 하랄드손도 있었다. 심지어 폴란드 최초의 국왕과 오랜 전쟁을 벌였던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2세조차 사후 백 년 만에 시성되었다.
기독교화를 주도한 공작이나 국왕은 본인이 아니더라도 아버지나 아들이 성인이 된 듯하다. 폴란드만 예외였다. 그 시대의 성인들은 있었지만, 나라를 기독교로 이끈 군주는 끝내 성인이 되지 못했다.

볼레스와프의 오랜 적수였던 황제 하인리히 2세마저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침실의 문제 때문이었을까?
『폴란드 교회사』 초반 장을 집필한 예지 라이만(Jerzy Rajman)에 따르면, 그 해답은 볼레스와프 용맹공의 의심스러운 사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폴란드 최초의 국왕이자 국내 교회 조직의 창시자는 다섯 은둔 형제 수도원을 세우고 성 아달베르트의 유해를 값으로 사들였으며, 갈루스 아노니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간통한 자들의 음낭을 다리에 못 박게 하는 형벌까지 집행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행실은 모범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교회는 그가 첫 두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낸 일, 그리고 네 번째 아내 오데(Ode)를 기독교 군주의 품위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굴욕을 안겼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실제로 1018년 그는 키예프 원정에서 루테니아 공주 프셰드스와바를 납치하면서 정식 아내를 무안하게 잊어버렸다.
같은 원정에서 포로로 잡힌 수도사 모제스 웅그린(Mojżesz Węgrzyn)은 용맹공이 한 폴란드 여인마저 죄에 빠뜨렸다고 기록했다. "한번은 그녀가 나를 자신의 몸 위에 눕히고 입을 맞추며 껴안게 했다."

전설 속 볼레스와프의 키예프 입성. 이 원정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시성 가능성을 좌절시켰을까?
요컨대 볼레스와프는 검으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침실에서도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성인의 관을 박탈할 이유가 될 만큼 치명적일까? 다른 군주들 역시 크게 덕망이 높지는 않았다. 역사에는 아홉 명의 주교 살해에 연루되었음에도 성인으로 추대된 프랑크 왕비 발틸다(Balthild)의 사례조차 있다.
아니면 정치의 문제?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면 정치일 수도 있다. 볼레스와프 입장에서는 아버지 미에슈코를 시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시복·시성 절차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성인 반열에 오르는 결정은 주로 해당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내렸다.
그러나 모든 정황은 볼레스와프가 그들과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갈루스 아노니무스에 따르면 라짐 가우덴티(Radzim-Gaudenty) 대주교는 폴란드 땅 전체에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그만큼 교회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 분명하다.
갈등의 근본 원인은 역사의 안개 속에 묻혀 있지만, 오랜 전쟁이 독일 출신 또는 독일 문화권에서 성장한 성직자들을 볼레스와프에게서 멀어지게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아들 미에슈코 2세의 처지도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를 성인으로 올리고 싶어도 이교도 반발과 왕위에서의 추방이 그를 효과적으로 가로막았다.
미에슈코 2세 자신도 독일에 적이 많았다. 아내 리헤자(Richeza)는 남편 곁을 떠나 '슬라브의 야만적인 풍습'과 '참을 수 없는 남편의 오만함'을 호소했다. 작센의 한 연대기 작가는 그를 '거짓 기독교인이자 살인자, 폭군'이라 불렀다.

볼레스와프 용맹공은 왕관을 썼지만 성인의 관은 쓰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나쁜 '홍보' 탓일까?
결국 문제의 핵심이 나쁜 '홍보(PR)'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정황이 많다. 특히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 이미지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어쩌면 미에슈코 1세나 볼레스와프 용맹공에게는 이름 앞에 '성(聖)'을 붙일 기회가 아직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먼 후손인 볼레스와프 대담공(볼레스와프 2세)이 교회와 더욱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폴란드의 수호성인 자리는 왕이나 공작이 아니라, 통치자에게 박해받은 주교(성 스타니스와프)가 차지했다. 이후로는 이 전통을 바꾸는 일이 어울리지 않게 된 것이다.
출처
이 글은 안제이 비엔츠크(Andrzej Więcek) 편집, Park Edukacja(2008) 간행 『폴란드 교회사(Historia Kościoła w Polsce)』를 주된 자료로 삼아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