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최초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인디언을 실제로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잔인한 야만인? 아니면 따뜻한 은인?

"잔혹하고 미개한 이교도", "여성과 아이를 죽이는 살인자",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이것은 19세기 백인 정착민들이 북미 원주민들에 대해 품었던 편견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최초의 이주자들은 '붉은 살결의 사람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유럽 정착민들과 원주민들의 첫 만남은 이후 19세기 내내 신대륙에서 벌어진 비극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예고하지 않았다. 양측의 태도는 호기심 어리고 우호적이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가져온 낯설지만 매력적인 물건들, 즉 옷, 화기, 술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반면 식민지 개척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 현지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북미 정착 사업을 주도하던 영국 버지니아 회사는 정착민들에게 "원주민들을 결코 불쾌하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라는 말도 없었다. 무엇보다 정착민들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되기도 했으니까.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케이프코드에 상륙한 102명의 영국 청교도, 이른바 '필그림 아버지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늘이 보낸 인디언, 스콴토

힘든 항해 끝에 상륙한 새내기들은 곧바로 식량을 찾아 주변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인디언의 흔적, 정확히는 그들이 저장해둔 옥수수 창고를 발견하고 가져가기도 했다. 이후 이 지역이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그들은 만 입구 깊숙이 들어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도시 플리머스를 세웠다. 하지만 그곳의 생활 여건 역시 극도로 험난했다. 혹독한 기후와 질병으로 하루에 두세 명씩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봄에는 필그림의 절반이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렇다면 당시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어땠을까? 1621년 3월 16일, 정착촌에서 기묘한 사건이 벌어졌다. 근처 언덕 위에 한 인디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는 망설임 없이 건물 쪽으로 다가왔다. 몇몇 남자들이 그의 길을 막자, 그는 손짓으로 인사를 건넨 뒤 서툰 영어로 "영국인님들 환영합니다(Welcome Englishmen)"라고 외쳤다. 그의 말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방문객의 이름은 사모셋. 그는 이 해역으로 드나드는 어부들에게서 정착민들의 언어를 배운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현지 왐파노아그 부족의 추장 마소소이트가 보냈다고 알려왔다. 며칠 후 그는 영어에 훨씬 능숙한 동료 스콴토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고, 스콴토는 통역사이자 중재자 역할을 자청했다. 그는 필그림들에게 장어를 잡아 먹여 주었고, 옥수수 재배법과 죽은 청어로 척박한 밭을 비옥하게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이 덕분에 식민지 개척자들의 상황은 크게 나아졌다. "스콴토 덕분에 필그림들이 훔쳐 온 옥수수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지만, 수입한 보리와 완두콩은 신대륙의 낯선 흙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고 저자 너새니얼 필브릭은 『메이플라워, 미국 탄생의 이야기』에서 적었다.

스콴토는 또한 청교도들과 마소소이트 추장 간의 동맹 협정 체결을 중개했으며, 여기에는 상호 지원이 명시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측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훗날 스콴토가 "그들이 예상치 못했음에도 하나님이 그들의 안녕을 위해 특별히 보내신 도구였다"고 회고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필그림의 구원자로 기억한다.

인디언 덕분에 탄생한 추수감사절

필그림과 현지 부족들의 협력은 곧 꽃피우기 시작했다. 가을에 열린 수확 감사 축제에 마소소이트 추장과 그의 전사들을 초대할 정도였다. 너새니얼 필브릭의 기록을 소개한다.

(...) 마소소이트는 갓 잡은 사슴을 들고 폭카노켓 전사 백 명과 함께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이는 당시 플리머스의 영국인 전체 인구의 두 배가 넘는 숫자였다. 필그림들이 집안의 가구를 모두 밖으로 꺼낸들, 참석자 대부분은 서 있거나 모닥불 주변 땅에 웅크려 앉아야 했다. 모닥불에는 뾰족한 막대에 꿰어 구운 사슴고기와 닭류가 올라갔고, 고기와 채소가 담긴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역사상 첫 번째 추수감사절로 불리며 미국 신화 속에 자리 잡은 이 잔치는 시간이 흘러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인디언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살인자 아니라 구원자였을지도 모르는 인디언들

초기 백인과 원주민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이었는지는 오늘날 노스캐롤라이나 연안 로어노크섬에서 벌어진 만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584년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배로 선장의 탐험대가 이 섬을 조사하던 중 현지 크로아탄 인디언들을 만났는데, 접촉은 매우 우호적으로 진행되었다.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에게서 옷을 선물로 받았고, 그들은 직접 잡은 생선을 손님들에게 내어놓았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작가이자 언론인인 토니 호위츠는 선원들을 위해 준비된 환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현지 여성들은 더욱 후했는데, 젖은 몸으로 지칠대로 지친 영국인들을 맞아주었다(...). 인디언 여성들은 [선원 중 한 명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의 옷을 벗겨 빨아주고 다시 말려주었다. 어떤 여성들은 우리의 양말을 벗겨 세탁해 주었고, 또 다른 이들은 우리의 발을 따뜻한 물에 씻어주었다".

탐험대원들은 (이토록 따뜻한 환대에 힘입었는지도 모른다) 요새를 세우고 섬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크로아탄족은 새내기들에게 사냥과 낚시를 기꺼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이윽고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첫 충돌이 일어났다. 곧 인디언들은 영국인들에게 식량 공급을 중단했고, 영국인들은 배에 올라 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1587년, 섬에는 두 번째 정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590년 또 다른 탐험대가 로어노크에 도착했을 때, 정착촌은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다. 주민들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시체도, 전투의 흔적도 없었다. 수색대가 찾아낸 유일한 단서는 울타리에 새겨진 '크로아탄(Croatoan)'이라는 단어였다. 일각에서는 정착민들이 납치되었거나 잉글랜드로 돌아가려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의 해답은 전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2015년, 영국과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로어노크에서 110km 떨어진 해터러스섬에서 16세기 영국 유물들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잃어버린 식민지' 주민들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학자들은 정착민들이 열악한 생활 여건 때문에 해터러스로 이주하여 그곳에 살던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더욱이 해터러스섬은 과거 '크로아탄'이라 불렸고, 실제로 크로아탄 부족이 거주하던 섬이었다. 이 경우 살인자로 의심받았던 인디언들은 사실 구원자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의 삶의 방식은 유럽식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최초의 정착민들과 인디언 사이의 우호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새내기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불화와 충돌이 있었던 시기에도 우정과 도움의 손길은 이어졌다.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마을이 대표적이다. 이곳을 이끌었던 것은 유명한 존 스미스였다. 이 모험가는 처음부터 원주민들을 향해 강경한 노선을 걸었다. 그들과 교역하면서도 화기를 겨눠 위협하고 갖가지 꾀를 부리며 공포를 심어주었다.

당연히 스미스가 포로로 잡혔을 때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숨은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가 구해주었다. 그녀는 사형수에게 몸을 던져 자신의 몸으로 그를 감싼 것이다. 이 소녀는 제임스타운 사람들에게 축복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심지어 자신의 혈족의 습격을 미리 알려주기도 했다. 포카혼타스만이 아니었다. 상호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정착민들은 현지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제임스타운은 처음부터 어려움과 싸워야 했다. 앞서 소개한 플리머스의 설립자들처럼 식민지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쓰러져갔다. 1607년 9월, 정착한 지 단 넉 달 만에 최초의 이주민 대부분이 이미 죽었고, 남은 식량은 겨우 몇 주 치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원주민들의 도움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토니 호위츠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제임스타운을 필연적인 파멸에서 구해낸 여러 차례의 개입 중 첫 번째였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사", 식민지민 퍼시는 기록했다,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그 사람들을 이곳에 보내셨으니, 그들이 빵, 곡물, 생선, 고기 등 풍성한 식량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었고, 이로써 쇠약해진 우리 백성을 살렸노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

평화로운 관계는 맨해튼섬에서도 이루어졌다. 1624년 네덜란드 출신 이주민들이 정착한 이곳의 레나페 인디언들은 친절했고, 손님들과 기꺼이 지식을 나누고 물물교환을 했다. 그들은 모피, 채소, 생선을 공급했고, 그 대가로 양모 옷과 금속 도구를 받았다. 식민지 개척자들 역시 교역과 농사에 만족해했다. 정복, 영토 강탈, 원주민 개종은 모두 미래의 일이었다.

그러나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이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디언들은 곧 백인 대다수가 자신들을 예속시키고 땅을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항복 없이 싸울 마음을 굳히면서, 거의 300년간 이어져 그들의 완전한 패배로 끝나는 피비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