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미국 최초의 은행 강도 사건, 마치 범죄 소설 같은 실화 이야기

미국 최초의 은행 강도는 기묘하게도 흔적 하나 없이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당시 화폐 가치로 약 300만 달러 상당의 돈이 사라졌지만, 이 사건은 미국 시민권을 위한 투쟁의 불씨를 지핀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건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미국의 첫 수도였고,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이 선포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781년에는 북미 최초의 은행인 '펜실베이니아 은행(Bank of Pennsylvania)'이 이곳에서 설립되었습니다.

18세기 말의 미국은 사법 체계를 갖추어 가던 초기 단계였습니다. 중앙정부도, 세금을 걷을 방법도 아직 마련되지 않았지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이를 개선하고자 연방 대법원과 순회·지방 법원 설립 등에 힘을 보탰습니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신개척지 개발,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숙련된 전문가와 장인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물론 값싼 노동력으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새롭게 발전하는 나라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본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자물쇠 장인 패트릭 라이언(Patrick Lyon)이었습니다.

라이언의 미국 정착기

패트릭 라이언은 25세에 스코틀랜드를 떠나 성공을 꿈꾸며 미국으로 항해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장인 밑에서 일하다가 곧 자신의 공방을 열었고, 덕분에 단순한 자물쇠 장인이자 대장장이를 넘어 발명가로까지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는 수력 모터를 만들었고, 배를 수중에서 수리하기 쉽도록 잠수종(다이빙 벨)까지 고안했습니다. 그는 유언장에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내 모루는 땅에 떨어졌고, 풀무는 숨을 잃었네.
화덕은 오래전 꺼졌으며, 대장간은 먼지에 덮였네.
석탄은 타버리고, 쇠는 녹아 흘렀네.
못은 두드려 박혔으니, 이제 일은 끝났도다.

미국 최초의 은행 강도 사건, 마치 범죄 소설 같은 실화 이야기

위 사진은 카펜터스 홀(Carpenters' Hall)에 있던 당시 펜실베이니아 은행의 모습으로, 패트릭 라이언이 새 금고 문을 설치하던 바로 그곳입니다.

수상한 의뢰

1793년, 필라델피아를 덮친 황열병은 도시 인구의 10분의 1을 앗아갔고, 그 희생자 중에는 패트릭 라이언의 아내와 아이도 있었습니다. 5년 뒤인 1798년, 다시 전염병이 몰려올 조짐이 보이자 라이언은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출발을 늦추는 뜻밖의 일이 생깁니다.

펜실베이니아 은행의 목공 기사 새뮤얼 로빈슨이 찾아와, 은행의 새 거처에 설치할 철제 금고 문을 의뢰한 것입니다. 자물쇠 교체 작업을 위해 라이언은 자물쇠를 자신의 공방으로 옮겨왔는데, 이튿날 새뮤얼 로빈슨이 수상쩍은 낯선 남자 한 명을 데리고 공방을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새 열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습니다. 금고 문 설치를 마친 라이언은 1798년 8월 28일, 십대 조수와 함께 필라델피아를 떠났습니다.

역사에 남은 은행 강도 사건

라이언이 작업을 마치고 떠난 지 며칠 후, 필라델피아의 은행 금고에서 무려 162,821달러—오늘 화폐 가치로 약 300만 달러—가 사라졌습니다. 9월 중순, 라이언이 머무르던 루이스턴에 강도 소식이 전해집니다. 신문 보도를 분석한 그는 침입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내부 직원들과 새뮤얼 로빈슨 본인이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라이언은 양심에 결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행동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진실을 규명하고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도시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그는 진범을 찾는 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오히려 체포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갇힌 독방은 겨우 3.6㎡였고, 그에게 남은 것은 기도와 성경 읽기뿐이었습니다. 라이언의 체포는 순경 존 헤인스의 증언 덕분이었는데, 헤인스는 이 공적으로 2,000달러의 포상금을 받았습니다.

유유히 누비던 진범

한편, 사건의 진범은 여유롭게 호사를 누리며 큰돈을 어디에 보관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기발한 생각이란, 그 돈을 은행에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금을 나눠 여러 금융기관에 소액씩 예금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턴 펜실베이니아 은행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계획은 그리 치밀하지 못했고, 그는 스스로 원해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 사기꾼은 유죄를 인정했지만, 사실상 금액 전부를 은행에 돌려놓는 데 성공하면서 감옥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범인은 누구였나?

범인은 바로 아이작 데이비스(Isaac Davis)로, 새뮤얼 로빈슨과 함께 패트릭 라이언의 공방을 찾았던 그 수상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은행 직원과 내통하여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자백에도 라이언은 철창에서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경찰 당국도 은행 측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감옥에는 황열병이 번지고 있었고, 라이언은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점점 체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나섰습니다. 친구들은 데이비스를 설득해 패트릭 라이언이 은행 강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받아냈습니다. 1799년 초, 노장 장인은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펴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은행 강도 사건에 대한 모호한 혐의로 필라델피아 감옥에서 석 달간의 가혹한 옥살이를 겪은 패트릭 라이언의 이야기』

미국 시민권 투쟁의 시작

1805년은 상징적인 해입니다. 이 해 패트릭 라이언은 은행, 지역 당국, 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것이 미국 최초의 시민권 투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당한 체포로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고, 명예가 훼손되었으며 직업 활동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은 엄청난 세간의 관심을 모았고, 여러 저명한 변호사들이 보수를 받지 않겠다며 그의 변호를 자청했습니다. 승소하려면 국가와 은행 당국이 선의가 아니었음을 입증해야 했는데, 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이작 데이비스가 유죄를 인정한 뒤에도 패트릭 라이언은 계속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라이언이 감옥에 갇힌 이유 자체가 '새 금고 열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추측에 불과했으니까요. 스코틀랜드 자물쇠 장인의 재판은 미국 평범한 시민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배심원단은 라이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는 결국 9,000달러의 손해배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평균 임금으로 수십 년 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출처

이 글은 다음 책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M. 와우쿠스키(M. Wałkuski), 『This is a robbery! A piece of America's unknown history』, Editio 출판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