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고대 로마의 심장, 38만 명을 수용한 거대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고대 로마 최대의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에는 고대 제국 최대의 볼거리 중 하나였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그리스의 히포드로모스에 해당하는 로마식 경기장으로, 수백 년에 걸친 확장 공사 끝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서커스', 즉 대형 오락 시설의 원형이자 상징이 되었습니다. 완성된 형태는 길이 544m, 폭 129m에 달했으며, 약 2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일부 자료에서는 최대 38만 명까지 들어섰다고 기록합니다. 두 언덕 사이의 계곡은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에 위치하고 지형도 매우 유리해, 고대부터 로마 최고(最古)의 경기와 함께하는 승마·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곳이었습니다.

경기장의 발전 과정

기원전 600년경 초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재위 시절 이곳에서 첫 전차 경주가 열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최초의 가동식 목조 건물들을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영구 건축물은 기원전 3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말 우리 역할을 하는 출발대(카르케레스)가 세워졌고, 기원전 174년에는 벽돌 구조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왜 기원전 329년 이전에는 이곳에 영구 건축물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요? 아마도 이 계곡은 농경지로 사용되어 작물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곡물 창고의 곡식을 맡은 로마의 신 콘수스에게 바쳐진 제단 등 마을 신들의 가장 오래된 성역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고대 로마의 심장, 38만 명을 수용한 거대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키르쿠스 막시무스 복원도. 제작: 카타리나 후버

역대 통치자들은 경기장을 계속 확장해 나갔습니다. 누마 폼필리우스 시대에는 관중석과 경기장을 나누는 울타리가 설치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기원전 55년경 분노한 코끼리 수십 마리가 울타리를 들이받아 관중들 사이에 큰 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권기에 경기장 전면 개보수가 진행되었습니다. 트랙이 넓어졌고, 비슷한 사고를 막는 동시에 배수 기능도 겸하도록 트랙과 관중석 사이에 수로가 만들어졌습니다. 관중석 역시 여러 해에 걸쳐 현대화되어 '구역'과 귀족석 등으로 나뉘었고, 각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모두 백성이 최상의 환경에서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의 공공 경기, 루디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의 종교 축제와 연관된 공공 경기인 루디(ludi)를 개최하는 로마 최대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반복적인 행사들은 부유한 로마인이나 로마 국가가 시민들을 위해 후원했으며, 후원자들은 이를 통해 정치적 지지를 얻곤 했습니다. 대부분 매년 열렸지만, 그리스에서 알려진 경기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했고 사치스럽고 화려했으며, 종교와의 연관성도 상대적으로 약해 오히려 정치적 축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심장, 38만 명을 수용한 거대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키르쿠스 막시무스 남쪽 관중석 전경

한쪽 끝이 둥근 직사각형 형태의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전차 경주에 맞게 설계되었습니다. 웅장한 규모와 스피나(spina), 즉 조각상·제단·장식물로 꾸며진 길고 낮은 중앙 분리벽으로 구획된 전용 트랙 외에도, 관중들은 남은 경기 횟수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스피나 양쪽에는 각각 세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여기에 한쪽에는 달걀 모양, 다른 쪽에는 돌고래 형상 등 일곱 개의 표지가 놓였습니다. 선수들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하나씩 치워 나갔던 것입니다.

백미, 전차 경주

수 세기 동안 이 경기장은 주로 두 마리(비가)와 네 마리(콰드리가) 말이 끄는 전차 경주에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세 마리, 여섯 마리 경주도 열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사슴이 끄는 전차 경주가 열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에 최대 24번의 경주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달려야 하는 거리도 매번 달랐는데, 어떤 날은 다섯 바퀴, 어떤 날은 일곱 바퀴였습니다. 대개 네 개의 다색 팀이 동시에 경쟁했으며, 전차와 마구, 선수의 복장은 소속에 따라 흰색, 빨간색, 초록색 또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었습니다. 관중들은 우승자에 내기를 할 수 있었고, 때로는 재산 전부를 걸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로마 지식인들은 이런 여가 활동을 비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로마 백성은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이런 오락을 사랑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심장, 38만 명을 수용한 거대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아우리가(auriga)라고 불린 마차부는 출발 신호를 듣는 순간 채찍을 손에 들고 말을 후려치며 속도를 냈습니다.

전차가 내는 속도는 때때로 엄청나서 사고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아우리가는 이런 상황에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투구를 닮은 모자를 쓰고, 허리에는 만약의 사태에 고삐를 끊을 수 있는 휘어진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주가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으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노예들이 전차를 몰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경기가 명예와 존경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귀족 가문 출신들이 점점 더 많이 마차부로 나섰습니다. 황제가 직접 아우리가 역할을 맡은 경우도 있었는데, 콤모두스 황제가 대표적입니다. 인기와 후한 상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법이니까요. 고대 로마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락의 장소, 비극의 현장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주로 전차 경주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검투사 경기, 베나티오(venatio)라 불린 야생동물 사냥과 학살, 그리고 '그리스식 경기', 즉 육상 경기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사비니 여인 납치 사건도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 건축물은 각종 사고와 재난의 피해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세 번, 서기 36년, 64년, 그리고 100년경에 큰 화재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기간에는 경기장 구조가 사실상 목조에서 석조로 전면 교체되었습니다. 홍수 피해를 입기도 했고, 가능한 한 복구하려 노력했습니다. 일부 보수 공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였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진행한 공사가 대표적입니다. 관중석 붕괴로 약 1만 3천 명이 목숨을 잃은 뒤였습니다.고대 로마의 심장, 38만 명을 수용한 거대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6세기까지 로마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전차 경주는 549년에 열렸습니다. 오늘날 관광객들은 과거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유적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참고 자료

  1. https://imperiumromanum.pl/kultura/architektura-rzymska/budowle-rzymskie/circus-maximus/ (2021년 11월 29일 확인)
  2. Wiesław Konrad Osterloff, 『체육의 역사(History of Sport)』, 바르샤바, 1976.
  3. American Institute for Roman Culture, 『Circus Maximus – Ancient Rome Live』
  4. https://www.wilanow-palac.pl/rozrywka_w_starozytnym_rzymie.html (2021년 11월 29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