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이 여성들이 없었다면 인터넷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디지털 산업을 연 숨겨진 여성 선구자들

타협을 모르는 수학자, 뛰어난 코더, 프로그래밍의 달인.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인터넷의 발전은 바로 이 비전가들 덕분입니다. 현대 컴퓨팅의 어머니들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기술의 역사를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지하실에 틀어박혀 있는 괴짜 남성들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대중문화도 이런 이미지를 굳혀왔죠. 하지만 역사는 한동안 컴퓨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여성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놀랍게도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19세기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유명한 시인 로드 바이런과 애너벨라 밀뱅크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특이한 힘들이 결합되어 태어난 존재"라는 평가처럼, 감정에 이끌린 광적인 예술가였던 아버지와 수학에 재능을 보인 빼어난 귀족 출신의 어머니, 두 사람의 기질이 그녀 안에 공존했습니다. 아버지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에다는 아버지의 폭발적인 상상력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여성들이 없었다면 인터넷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디지털 산업을 연 숨겨진 여성 선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종종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여겨집니다.

그녀는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병약하면서도 조숙했고, 비범한 감수성과 날카로운 분석적 두뇌를 동시에 지녔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비행 장치를 설계하고, 스승들을 능가하기도 했죠. 십 대 시절에는 저명한 영국 과학자 메리 서머빌과 친분을 맺었고, 그녀의 격려로 더 깊은 학문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덕분에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뛰어난 수학자 찰스 배비지를 만나게 됩니다. 에다는 이후 자신의 정신적 삶 전부를 배비지에게 바칩니다.

기존 관념을 거스르는 사고방식이 배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발명품에 담긴 상상력에 감탄했습니다. 고립된 환경에서 엄격한 어머니의 감시 아래, 로드 바이런의 시적인 기질이라곤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고 결심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에다는 배비지가 자신을 알아봐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숫자 연산, 즉 수학적 추론의 최고 단계가 깊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수학은 그 자체로 한 형태의 시였습니다.

배비지가 해석 기관(Analytical Engine) 제작에 착수하자, 이탈리아의 엔지니어 L. F. 메나브레아가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에다는 이 글을 번역하면서 잘못된 부분까지 바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석 속에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여겨지는 도표를 만들어냈습니다. 해석 기관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에이다의 주석은 IT 문헌보다 거의 한 세기 앞선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 '에이다(Ada)'가 탄생했습니다.

프로그래밍의 개척자, 그레이스 호퍼

이 놀라운 여성의 업적은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미국 해군에서 복무하며 소장(Rear Admiral) 계급까지 올랐습니다. 예일대학교 최초의 여성 박사이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그곳에서 강의를 맡았습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레이스 역시 애국의 의무를 무겁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체중이 기준에 크게 못 미친다는 이유로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으면서 계획은 좌초됩니다. 결국 그녀는 배서 대학교를 '압박'해 입대를 허락받습니다.

그녀는 대학교에 사실상 최후통첩이 아닌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여섯 달 안에 결정하지 않으면 어차피 떠나겠다고 말한 것이죠. 나이도 많고 몸도 말랐으며, 시력은 남동생만큼이나 나빴지만, 그녀는 실제로 그렇게 해냈습니다. 진주만에 폭탄이 떨어지던 날, 그레이스 앞에는 완벽하게 훌륭한 중산층의 삶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녀는 그 길 위에 한 걸음도 내디디지 않았습니다.

이 여성들이 없었다면 인터넷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디지털 산업을 연 숨겨진 여성 선구자들

그레이스 호퍼는 미국 IT의 개척자입니다.

그레이스는 남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끝내 바다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항법 계산 프로젝트 사무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전장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두 마리의 짐승'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는 그녀가 배속된 프로젝트 책임자, 성격이 폭발적인 하워드 에이컨 중위였고, 다른 하나는 IBM이 제작한 기계 마크 I(Mark I)였습니다. 그녀에게는 이 '짐승'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도록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천성적으로 독학형 인재였던 그녀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코드북을 파고들며 두 명의 소위에게 질문을 쏟아냈고(...), 마크 I의 설계도와 배선도를 연구하며 기계의 구조를 파악하려고 밤늦게까지 앉아 있었습니다. 가끔은 책상에서 잠들기도 했습니다.

전쟁 중과 이후 그녀는 최초의 번역기와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에 매진했고, UNIVAC I용 최초의 컴파일러를 작성했습니다. '버그(bug)'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린 것도 바로 그녀입니다. 에커트-몰클리 컴퓨터 회사에서는 폭넓은 상업용 응용 분야를 위한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설계를 도왔습니다.

1971년부터 국제 컴퓨터 학회(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는 컴퓨터 과학 분야의 뛰어난 공헌에 대해 그녀의 이름을 딴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밍의 달인들, ENIAC의 여섯 명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건조된 최초의 컴퓨터 ENIAC은 여섯 명의 특별한 여성들이 운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당당하게 컴퓨터 과학의 어머니라 불러도 좋습니다. 케이 맥널티, 진 제닝스, 베티 스나이더, 말린 웨스코프, 프랜 빌라스, 루스 리히터맨입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그들(ENIAC 50주년 행사에도 초대받지 못했습니다!)은 사진 속에서도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았지만, 클레어 L. 에번스의 획기적인 저서 덕분에 승리의 기세로 돌아왔습니다.

ENIAC의 여섯 명은 아직 눈으로 본 적도 없는 장치를 위한 프로그램을 종이 위에서 작성하며 훈련했습니다. 1945년 12월 마침내 완성된 ENIAC을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가구 몇 개를 들이기도 버거운 방 안에 놓인 검은 강철로 된 거대한 U자형 구조물을 마주했습니다. (...) 프로그래밍한다는 것은, 여섯 명이 알게 되었듯이 책상에 앉아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성들은 ENIAC 내부에 직접 들어가 각 작업을 '연결'해야 했고, 수백 개의 케이블과 약 3천 개의 스위치로 유닛들을 순서대로 배열해야 했습니다.

이 여성들이 없었다면 인터넷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디지털 산업을 연 숨겨진 여성 선구자들

글렌 벡(사진 뒤편)과 베티 스나이더(앞쪽)가 필라델피아의 탄도 계산 센터에서 ENIAC을 프로그래밍하는 모습. 1947년~1955년 사이 촬영.

컴퓨터를 설계하는 일과 실제로 작동시키는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ENIAC 제작에 참여한 남성들은 프로그래밍에 '다소 소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작업 준비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고, 기계가 어떻게 작동할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 임무는 여성 개발팀에게 넘어왔습니다. 바로 그들 덕분에 과학·군사계를 위해 준비된 시연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베티 진 제닝스와 베티 스나이더의 기름진 노력 덕분에 탄도 궤적 계산 결과가 선보였고, 방문객들은 압도적인 감동을 받았으며, 이 프로젝트 전체가 구원받았습니다.

ENIAC의 여섯 명이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모든 프로그래머들이 국제 여성 기술 명예의 전당(Women in Technology International Hall of Fame)에 헌액되면서 그 공로가 빛을 보게 되었죠.

하지만 인터넷의 역사에는 이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잊혀진 여성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해커, 사이버 활동가, 펑크 프로그래머들. 클레어 L. 에번스의 최신 저서 『인터넷의 개척자들』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