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 도시를 지배하던 시대, 한 시민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장례는 유족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 정부인 시뇨리아(Signoria)가 직접 장례 절차에 개입했고, 예복과 조명, 만찬 메뉴까지 세세한 규정으로 통제했습니다. 오늘날 눈으로 보면 다소 생경하지만, 당시로서는 사치와 낭비를 막기 위한 사회적 장치였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 흰색 모슬린 예복
장례식에 앞서 고인은 간소한 짚 매트리스 위에 안치되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 앞에 공개되었습니다. 남자 고인은 태펫(taffeta) 안감을 댄 흰색 모슬린 예복을 입고 머리에는 장식 없는 모자를 썼습니다. 여자 고인의 경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모두 빼야 했는데, 값싼 반지만큼은 그대로 두어도 무방했습니다.
촛불 하나까지 통제한 낭비 방지 규정
장례 의식에는 초 두 개 또는 횃불 네 개가 사용되었습니다. 의식이 끝나면 초는 다시 약국으로 반환되었는데, 법률은 약국이 하루에 15파운드(약 6.8kg)를 넘겨 초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이를 비추는 데 초를 쓰는 것은 낭비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규정을 어긴 자에게는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대충 꿰맨 상복, 장례 후에는 다시 분해
관 바로 뒤에는 울음꾼들이 줄지어 따랐습니다. 이들이 입은 검은 드레스는 대충 꿰매어 잇기만 한 천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장례가 끝나면 옷을 다시 분해해 천을 재활용했습니다. 상복 한 벌조차 아까워하던 시대의 검소함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부고 알림이부터 장례 만찬까지
부고를 알리는 사람과 묘지 굴착자는 노동의 대가로 8솔리드(sous)를 받았습니다. 장례 만찬 역시 사치를 경계해 음식 코스를 두 가지 이상 차리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매장지는 합장묘지, 특권층만 교회에
마지막으로 고인은 합장묘지(낭골)에 안장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에 한해서만 교회 안 매장이 허락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분의 격차가 고스란히 드러난 셈입니다.
출처: 장-뤼카 뒤브르통(Jean-Lucas Dubreton), 메디치 시대 피렌체의 일상생활(Daily Life in Florence at the Time of the Medi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