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왕정(July Monarchy)은 삼일혁명(Trois Glorieuses, 1830년 7월 27, 28, 29일)으로 알려진 혁명적 시기의 결과로 탄생한 입헌적 자유주의 왕정입니다. 이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인의 왕(King of the French)'으로 즉위했습니다. 상공업계에 우호적이었던 이 새로운 체제는 전통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평가받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영국과의 화해 정책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한편, 북아프리카·흑아프리카·극동·태평양 등지에서 새로운 정복 정책을 펼쳐 프랑스 식민제국에 제2의 전성기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1848년 2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무너졌습니다.
7월 왕정의 '계몽된' 군주, 루이 필리프
루이 필리프는 1773년 10월 6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에갈리테(Philippe Égalité)를 통해 카페왕조의 후예였고, 모친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팡티에브르(Adélaïde de Bourbon-Penthièvre) 역시 툴루즈 백작의 딸로서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발루아 공작, 샤르트르 공작의 작위를 잇달아 물려받았으며, 제네스 백작부인(Comtesse de Genlis)의 지도 아래 계몽주의 정신에 입각한 폭넓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1789년 혁명이 발발하자 젊은 왕자는 혁명의 열기에 동참해 자코뱅 클럽에 가입했고, 혁명군의 초창기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포정치의 살육 행위를 목격하고 혁명의 이상에서 등을 돌렸습니다.

1793년 부친 필리프 에갈리테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그는 스위스, 미국, 스웨덴, 독일, 영국 등을 전전하며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1809년 시칠리아에서 망명 중이던 그는 마리아 아멜리아 드 부르봉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1814년 루이 18세와의 화해 시도가 성공했으나, 1817년 오를레앙 공작이 되어 오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 때까지 그는 사촌인 국왕의 정책에 맞서 자유주의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샤를 10세의 험난한 왕위 계승
생클루 4개 칙령(Four Ordinances of Saint-Cloud) 반포와 삼일혁명 기간 파리 시민의 봉기로 샤를 10세는 랑부예에서 퇴위를 강요받았습니다. 자손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던 그는 아들 앙굴렘 공작(프랑스 황태자)에게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손자 보르도 공작에게 양위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이에 앙굴렘 공작은 '루이 19세'라는 이름으로 불과 몇 분간 재위한 뒤 물러났고, 앙리 5세(Henry V)라 칭하며 샹보르 백작(Count of Chambord) 작위를 받은 보르도 공작은 정통파(Legitimists)의 눈에만 왕위 계승자로 비쳤습니다. 샤를 10세가 구상한 왕위 계승 계획에는 오를레앙 공작을 왕국 섭정으로 임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루이 필리프의 즉위
1830년 혁명 와중에 일부 부르주아지는 정권의 연속성을 위해 카페왕조의 후예인 루이 필리프 왕자를 지지했습니다. 공화정 수립론도 제기됐으나, 공포정치의 기억이 생생했던 탓에 왕당파와 자유주의자들은 타협해 자유주의 입헌 군주정을 세우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에 많은 공화파 인사들이 샤를 10세의 퇴위 문서를 무시하고 오를레앙 공작에게 왕국의 섭정장관(Lieutenant General of the Kingdom)직을 제안했습니다.

민심이 자신에게 기울고 있음을 감지한 왕자는 샤를 10세가 제안한 계승안을 수용하는 데 주저했습니다. 7월 31일 파리 시민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1830년 8월 7일, 양원(하원·귀족원)의 찬성 투표에 힘입어 공식적으로 '프랑스인의 왕 루이 필리프 1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개정된 1814년 헌법 헌장(Constitutional Charter)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7월 왕정의 헌법 헌장
7월 혁명 직후 1814년 헌법 헌장의 정부 체제가 연장되었습니다. 루이 필리프는 정치인들의 야심을 이용해 새로운 납세 자격 선거제도를 활용,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프랑스는 의원내각제적 성격을 띤 대의제 정치를 경험했으며, 태동기 산업혁명의 여파로 경제 발전을 누렸습니다.
헌법 헌장은 의회를 양원제로 구성했습니다. 5년 임기의 하원은 납세 자격 선거로, 세습적인 귀족원은 국왕이 임명하는 의원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1831년 12월 29일 법으로 국왕의 귀족 임명권이 폐지되면서 상원의 정치적 역할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또한 하원은 선거권 자격, 납세 기준, 피선거권 조건 변경을 추진해 1831년 4월 19일 법으로 연간 직접세 납부액을 낮추고 투표 최저 연령을 하향 조정했습니다.
일부 자유주의 야당은 국왕이 자유주의 정신과 개혁에 배치되는 보수 정책을 편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헌법 헌장에 명시된 원칙과 권리를 교묘히 준수하며 통치했습니다. 즉위 초기부터 루이 필리프 1세는 왕권의 완전한 행사를 원했고, 의회제의 내재적 약점을 이용해 여러 차례 하원 해산권을 행사해 자파 다수파를 확보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총리(내각수반)들은 국왕의 강한 의지 앞에 저항을 포기했습니다.
야심 찬 대외 정책
유럽 열강은 7월 왕정의 수립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루이 필리프는 국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나폴레옹 시대의 화려한 원정을 그리워하던 프랑스 국민의 불만은 컸습니다. 1831년 차남 네무르 공작에게 벨기에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고, 1832년 장녀 루이즈를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와 결혼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내전 개입, 멕시코·아르헨티나 전쟁 참전 등에 나섰고, 마르키즈 제도를 점령해 중국과 통상 관계를 맺었습니다. 영국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그리스·오스만 제국에서 양국의 상업·정치적 경쟁은 계속되었습니다. 1845년 노예무역 금지 조약이 체결되는 한편,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를 확대했습니다. 알제리와 모로코 점령이 본격화되었고, 1847년 압드 엘카데르(Emir Abd el-Kader)가 오말 공작(Duke of Aumale)에게 항복하며 알제리 정복이 사실상 마무리되었습니다.
교육과 교회
1833년 6월 28일 법(기조법)은 초등교육의 책임을 교회에서 세속 권력으로 이관했습니다. 의무교육은 아직 실시되지 않았으나, 정부 조치들은 전반적으로 중산층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교육 과정은 다양하고 비전문적이어서 국가 공직이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지 않게 했습니다.
1842년에는 공장 아동 노동에 관한 입법도 이루어졌습니다. 공화파의 주도로 7월 왕정은 정교분리를 선언해 국왕이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재정적으로 큰 이득을 보게 했습니다.
대토목 사업과 예술계
개선문, 마들렌 사원, 파리 시청사 등 공공 건축물이 완공되거나 착공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사의 주요 군사·정치 사건을 전시하는 국립 박물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유해가 성대하게 앵발리드에 안치되었고, 프랑스 주요 도시를 잇는 장거리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7월 왕정기에는 낭만주의가 문예계의 선구자들을 자극했습니다. 낭만주의 미술은 석판화를 부활시켰고, 회화계는 외젠 들라크루아가 단연 주도했습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역사화와 초상화의 고전적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정부의 국정 운영

파리와 지방, 구특권층과 신흥 세력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습니다. 공화파·왕당파·정통파·보나파르트파 등 극단적 정당들 사이에 낀 루이 필리프 1세는 온건 자유주의 정책으로 이들을 부분적으로 화해시키려 했습니다. 타협과 정치적 선회, 자신에게 가해진 반란에 따라 그는 은행가 자크 라피트(Jacques Laffite)를 총리로 기용했다가 공화파의 반발에 부딪혀 1831년 카지미르 페리에(Casimir Perier)를, 이어 달마티아 공작(마르셜 니콜라 술트, Nicolas Soult)을 내세웠습니다.
정부는 언론 자유, 형법 개정, 노예무역 탄압과 노예 해방, 도박장·복권 폐지, 징병제 등 핵심 현안에 입법했습니다. 그러나 1845년부터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입법 개혁과 자유화는 급제동이 걸렸습니다.
1846~1847년 농업 위기로 농민과 노동자가 궁핍해지고 불만이 고조되자 야당의 공세는 거세졌고, 노쇠한 국왕은 연이은 공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마르셜 술트 내각에 이어 역사가이자 언론인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루이 마티외 몰레(Louis Matthieu Molé),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 내각이 빠르게 교체되었습니다.
체제 위기와 7월 왕정의 종말

7월 왕정을 지탱하던 입헌 군주제는 내부 갈등과 프랑스 행정부의 만성적 불안정으로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불안정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알력 다툼에 있었습니다. 1848년 2월, 급진파의 연회 금지와 파리에서의 유혈 진압 끝에 기조 내각은 총사퇴했습니다. 혁명이 파리 전역으로 번지자 국왕은 군중에게 발포하는 대신 퇴위를 선택했습니다.
퇴위 문서에서 루이 필리프 1세는 손자 파리 백작 앙리(Henri, Count of Paris)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을 섭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려는 공화파는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과 알렉상드르 오귀스트 르드루롤랭(Alexandre Auguste Ledru-Rollin)이 제2공화정의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반대파에 직면한 국왕은 망명을 결심했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교적 배려로 클레어몬트 성(Claremont Castle)에 머물며 뇌이 백작(Count of Neuilly)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1850년 8월 26일,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고 문헌
- Sébastien Charletty, Histoire de la Monarchie de Juillet (1830-1848), Perrin, 2018.
- Hervé Robert, La Monarchie de Juillet, Avril, 2017.
- André Castelot, Louis-Philippe : l'inconnu, Perrin,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