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함부르크에서 광활한 세상으로 – 500만 이민자의 출발점

1900년경 함부르크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이민 항구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동유럽인들이 이곳에서 배에 올랐고, 그 목적지는 미국이었습니다. 1850년부터 1934년 사이에만 무려 500만 명의 이민자가 이 항구에서 신대륙으로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글: 야닌 쿨(Janine Kuehl)

빈곤을 탈출하고 행복을 찾다

그 이전에는 로테르담, 안트베르펀, 르아브르가 주로 대양 횡단의 출발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몰려오는 이주 물결이 커지면서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 북미·남미로 향하는 증기선 운송은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수백만 사람에게 이주는 자유와 번영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민의 동기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정치적 이유가 우세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1848년 독일 각국에서 혁명이 실패한 이후였습니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경제적·사회적 필요가 두드러졌습니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벌어진 포그롬(유대인 학살), 징병 위협, 상속 순위에서 밀리는 처지 등이 사람들을 고향에서 내몰았습니다.

숫자로 보는 이민

1856년 하파크(Hapag) 해운회사는 함부르크에서 뉴욕까지 단 3,043명의 이민자만 수송했습니다. 그 수는 파도처럼 오르내리며 1890년에는 66,862명에 달했습니다. 1903년부터는 매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한자 도시를 거쳐 계속 이민을 갔습니다. 물결의 정점은 1913년으로, 그해 무려 192,733명의 이민자가 출발했습니다.

콜레라 발생 후 입항 금지

이민자 대부분은 기차로 함부르크에 도착한 동유럽인이었지만, 농부와 공장 노동자 등 독일인들도 이 한자 도시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함부르크 하파크 해운회사의 증기선을 타고 아메리카로 떠났지만, 보통 선상의 빈자리가 날 때까지 한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인파가 워낙 많아 시내의 민영 숙소는 늘 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1892년 이민 역사에 큰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콜레라가 발생하자 함부르크 상원은 엄격한 입국 금지령을 내렸고, 한자 도시의 이민 교통은 급격히 멈춰 섰습니다. 이는 하파크 해운회사에 큰 손실을 의미했습니다. 총감독 알베르트 발린(Albert Ballin)은 상원과의 힘든 협상 끝에 1893년부터 다시 이민자들이 함부르크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합니다. 다만 이민자들은 입국이 허용되기도 전에 의료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함부르크 시민들은 특히 러시아인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러시아인들이 대콜레라 유행의 원인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발린이 지은 '도시 속의 도시'

특히 동유럽 이민자들은 함부르크를 통해 이주했으며, 승선까지 몇 주씩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도시는 동유럽에서 온 소위 '통과 이민자'의 급증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발린은 숙소와 기존의 막사 부담을 덜고, 이민자들을 최대한 시내 밖에 머물게 하며, 마침내 자신의 선박 가동률도 극대화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1901년부터 이 수완가는 엘베 강 베델(Veddel) 섬에 여러 이민자 홀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까지 부지는 끊임없이 확장되었고, 하나의 '도시 속의 도시'가 탄생했습니다. 모두 30개 동으로 최대 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별도로 모집되었으며, 이들을 위해 회당과 전용 기숙사, 코셔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이 마련되었습니다.

막사와 '올 인클루시브' 케어 사이

여권, 비자, 티켓 같은 필수 서류 없이는 이민이 불가능했습니다. 이민자들은 드디어 배에 탑승하기 전까지 이민자 홀에서 몇 주씩 머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직원 150명이 이곳에서 칼 같은 일과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했습니다. 하루 2마르크를 내면 침대와 세 끼 식사를 제공받았습니다. 이민자들은 천장이 높고 비교적 널찍한 기숙사에서 잤기 때문에, 공기가 종전의 낡은 막사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음악 밴드와 작은 상점이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를 더해 주었고, 교회와 회당의 예배는 불안과 걱정을 달래 주었습니다. 또한 종교 단체들은 목회 활동뿐 아니라 서류 발급이나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실질적인 도움도 제공했습니다.

건강한 사람만 탑승 가능

위생 검역은 이민자 홀의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이민자들은 목욕을 하고 의학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옷과 짐이 소독된 후에야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체류 내내 수차례 검사가 이어졌고, 승선 직전 최종 건강 검진에서 누가 실제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지 결정되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인 등 일부 이민자 집단에게 통행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 이런 강제 조치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감옥 같은 억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항의는 산발적으로 그치며 효력을 내지 못했습니다.

횡단 비용은 연봉 하나 값

300명까지 수용 가능한 소형 선박인 소위 '텐더(tender)'를 타고 이민자들은 슈타데나 쿡스하펜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마침내 대양 여객선에 승선했습니다. 흘수가 깊은 대양의 거함들은 엘베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증기선 항해는 보통 2주가 걸렸고, 나중에는 고속 증기선 덕분에 9일로 단축되었습니다. 이민자 대부분은 창문이 없는 3등실(스티어리지)에서 160마르크를 내고 여행했습니다. 이 금액은 당시 노동자의 연봉과 맞먹는 돈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3등실 승객들이 얻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환기, 좁은 공간, 축축한 환경, 멀미의 고통이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갑판에도 제한적으로만 나갈 수 있었고, 폭풍우가 칠 때는 아예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엘리스 섬: 신세계의 관문

미국의 첫 목적지는 뉴욕 앞바다에 있는 엘리스 섬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민자들은 꿈의 땅에 입국이 허용되기 전 다시 한번 건강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입국이 거부되면 해운회사 부담으로 다음 배편으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1907년에는 48,000명의 이민자가 함부르크로 되돌아왔습니다. 입국이 거부된 사람은 소수였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외에서 크고 작은 재산을 모은 것입니다.

포로수용소에서 피난처로

1913년 함부르크에서 출발한 이민자는 192,733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이민 행렬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이민자 홀은 '위버제하임(Überseeheim)'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이제 대부분 독일인이 된 이민자들의 더 높은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쾌적함이 한층 강화된 것이었습니다. 1934년 홀 일부는 나치 친위대(SS) 소유가 되었고, 이후 부지 전체가 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 후 건물들은 폭격으로 집을 잃은 함부르크 시민들을 위한 임시 주거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962년 건물들은 철거되었고, 13·14호 파빌리온만 남았습니다. 오랫동안 이곳에는 트럭 정류장이 영업했고, 1980년대 초에는 포르투갈 식당이 이 홀에 들어섰습니다. 2005년, 이민자 홀이 건설된 지 거의 100년 만에 '발린슈타트(BallinStadt)' 체험 박물관의 기초석이 놓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