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하치미할리스 달리아니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1821년 혁명의 기병대장

하치미할리스 달리아니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1821년 혁명의 기병대장

"팔리게네시아(재생) 투쟁의 기병대장"이라는 문구가 이오아니나 지역 델비나키의 영웅 정원에 세워진 전쟁영웅 하치미할리스 달리아니스(Hatzimichalis Dalianis)의 흉상에 새겨져 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영웅적 투쟁에 델비나키 마을은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에피루스에서 태어난 영웅

영웅은 1775년,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던 에피루스(Epirus) 포고니(Pogoni) 지역의 델비나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28년 5월 18일, 크레타 섬의 프랑코카스텔로(Frangokastello)를 끝까지 방어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9년 전, 스파키아(Sfakia) 자치체는 이 위대한 투사에 대한 작은 헌사의 의미로 포고니 자치체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름의 유래

그의 본명은 미하일 크리스토우(Michael Christou)였다. 포고니 시장 코스타스 카프살리스는 그의 용맹한 인물상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이름에 붙은 '하치스(Hatzis)'는 그가 요르단 강까지 여행하여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며, '달리아니스(Dalianis)'는 당시 사용되던 짧은 이탈리아식 단검 '달리아니(daliani)'에서 유래한 것이다.

재산을 국가에 바치다

젊은 에피루스 청년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으나, 이후 트리에스테에서 담배 산업에 종사해 큰 재산을 축적했다. 1816년, 아르기로카스트로 출신 알렉산드로스와 미하일 바실리우 형제의 소개로 비밀결사 '필리키 에테리아(Filiki Etaireia)'에 입회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 그의 눈에는 오직 조국 해방의 길만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국가 대의를 위해 처분하고 청산했다. 자비로 그리스 최초의 기병 부대를 창설했으며, 국고에 16,163 그로시(grosi)를 기부했다. 1826년에는 배 세 척을 전세 내고 800명의 의용병을 이끌고 레바논에 도착했다. 이는 에미르 바시르(Emir Bashir)가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를 일으킬 경우를 지원하기 위한 양동 작전이었으나, 현지에 도착했을 때 에미르의 의향이 이미 바뀐 상태였고, 그는 그리스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펠로폰네소스와 중앙 그리스에서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와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스카키스(Georgios Karaiskakis)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웠다.

크레타 혁명의 지휘관

1827년, 그는 그리스 기병대 총사령관 직위를 받았다. 이후 크레타로 건너가 500명의 병력과 1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혁명을 주도하게 되는데,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들 중 무려 385명이 에피루스 출신이었다고 한다. 1828년 1월, 그는 그라무부사(Gramvousa)에 상륙해 초기 거점으로 삼았고, 이후 스파키아 남동쪽의 프랑코카스텔로에 진영을 구축했다.

불공평한 전투의 시작

키도니아(Kydonia)의 무스타파 파샤(Mustafa Pasha)는 하치미할리스의 도착 소식을 듣자마자 페르만(칙령)으로 스파키아인들을 위협했고, 8,000명의 병력과 400명의 기병, 중포병을 이끌고 프랑코카스텔로 맞은편에 진을 쳤다. 동시에 하치미할리스에게 10일 안에 그곳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페르만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신의 도움으로 싸워 승리하기 위해 크레타에 왔다." 그는 즉시 프랑코카스텔 방어 준비에 착수했다.

스파키아인들은 병사 일부만 요새에 남기고 산으로 올라가, 적이 공격해올 때 고지에서 무스타파 파샤와 싸울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기병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하치미할리스는 성에 남았고, 요새에서 약 300미터 반경 내에 석재 보루를 쌓기 시작했다.

프랑코카스텔로의 최후

5월 13일, 터키군은 모든 병력을 프랑코카스텔로 근처에 집결시켰고, 공격은 5일 후인 18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처음부터 불공평했다. 터키군은 수적으로 압도적 우세했고 무장 또한 강력했다. 한 보루에서는 하치미할리스의 병사 약 100명이 오스만군에 의해 전사했으며, 키리아쿨리스 아르기로카스트리티스(Kyriakoulis Argyrokastritis)도 그중 하나였다.

하치미할리스는 다른 두 보루의 병사들을 요새 안으로 데려오기 위해 기병대와 함께 성 밖으로 나섰다. 성문 앞의 전투는 피로 물들었다. 영웅의 검은 부러졌고, 말은 부상을 입었으며, 사방으로 포위된 채 그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머리는 무스타파 파샤에게 전리품으로 넘어갔다.

하치미할리스 달리아니스와 함께 약 350명의 그리스 영웅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크레타에 와 싸우다 프랑코카스텔로에 영면했다. 독립전쟁의 증인 마크리기안니스(Makrygiannis)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하치미할리스와 그의 부하들의 용맹함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달리아니스 가문의 뿌리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하치미할리스 달리아니 가문의 고향은 드로폴리(Dropoli) 지역의 불리아라티(Vouliarati) 마을이다. 오늘날에도 불리아라티에는 달리아니스 성씨가 이어지고 있으며, 이 가문은 높은 경제적·교육적 수준으로 지역의 명성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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