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르사유 조약(1919) 총정리 – 제1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실패한 평화'가 된 이유

베르사유 조약(1919) 총정리 – 제1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실패한 평화 가 된 이유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홀에서 연합국과 독일 간에 체결된 강화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공식적인 종말을 고한 문서입니다. 여러 대륙에 걸쳐 수십 개국이 연루된 전례 없는 참화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이 조약은 20세기 역사의 결정적 분수령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된 패전국 독일은 가혹한 징벌을 통째로 떠안았습니다. 독일의 굴욕과 미국의 국제적 부상을 동시에 상징한 이 조약은 새로운 민족주의의 분출을 촉발했고, 불과 20년 뒤 더 참혹한 세계대전을 불러오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파리 강화회의: 승전국들이 그린 새로운 유럽

1919년 1월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는 승전국들만이 규칙을 정하고 선포하는 무대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 총리 올란도 등 이른바 '4인의 거두'가 유럽의 운명을 사실상 좌우했습니다. 당시 유럽 패권의 종언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으며, 이는 미국 대통령이 1년 전 공식화한 '14개 조항'으로 구체화됩니다. 이 세계 평화 프로그램의 핵심 원칙은 바로 민족 자결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전쟁의 성격과 해법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였습니다. 클레망소는 "미국의 유럽 재편 야망은 역사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며 경계했습니다. 실제로 구대륙의 지도는 이미 뒤집혀 있었고, 수백 년 역사의 국가들은 소멸하고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막강한 국력을 등에 업은 윌슨은 평화와 국제 협력, 그리고 모든 회원국의 안전을 법적 평등 속에 보장하는 국제연맹 헌장을 강화조약에 포함시키기를 희망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1919) 총정리 – 제1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실패한 평화 가 된 이유연합국 간의 협상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라인강 좌안과 루르 지역의 통제, 그리고 상당한 배상금 확보를 추구했지만, 독일의 완전한 몰락이 가져올 상업적 타격을 우려한 영국·미국과 충돌했습니다. 일본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 대한 독일의 조계를 요구해 중국과의 갈등을 촉발했고, 격분한 중국 대표단은 회의장을 떠났습니다(1919년 5월). 또한 런던 조약(1915년 4월 26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윌슨의 주장에 따라 연합군은 피움메와 달마티아의 이탈리아 병합을 거부했고, 이에 이탈리아 대표단도 잠시 회의장을 나섭니다(1919년 4~5월). 그럼에도 6월 17일, 연합군은 마침내 조약 최종본을 독일 정부에 송부할 수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영토 조항

영토 조항은 독일 영토의 8분의 1과 1914년 독일 인구의 10분의 1을 잘라냈습니다. 서쪽에서는 알자스-로렌이 프랑스에 반환되었고, 벨기에는 외펜과 말메디의 작은 영토를 받았습니다. 자르(Sarre) 지역은 15년간 국제연맹 관리 하에 놓였으며, 기간 만료 후 주민투표로 귀속을 결정하되 그동안 프랑스가 탄전의 소유권을 행사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1919) 총정리 – 제1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실패한 평화 가 된 이유동쪽에서 독일 영토는 두 동강 났습니다. 재건된 폴란드는 포즈난과 서프로이센을 병합해 발트해로 통하는 출구를 확보했습니다. 메멜과 끊어진 동프로이센은 유명한 단치히 회랑(자유시 단치히)을 사이에 두고 본토와 분리되었습니다. 상부 실레지아의 귀속은 주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해당 영토는 국제연맹 명의로 프랑스·영국·남아프리카연방·일본에 위임통치로 넘어갔습니다.

국경 변경과 관련해 '민족 자결' 원칙은 곧바로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1919년의 영토 재편은 새로운 불만 세력, 즉 또 다른 '소수민족'들을 양산했습니다. 특히 동쪽의 단치히 '회랑' 설치는 독일과 폴란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연합군은 이 지역이 볼셰비즘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비준한 생제르맹 조약(1919년 9월 10일)과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4일) 역시 민족주의 긴장의 또 다른 불씨가 되었습니다.

군사적, 경제적, 도덕적 조항

군사 조항은 독일 참모본부의 해산, 징병제 폐지, 중포병·군용기·전차·잠수함·전함의 보유 금지를 골자로 했습니다. 독일 육군은 10만 명, 해군은 1만 6천 명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연합군은 라인강 좌안과 마인츠·코블렌츠·쾰른의 세 교두보를 15년간 점령하기로 했고, 우안에는 깊이 50km의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독일에 있다고 규정된 만큼, 독일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배상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요구 금액 자체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1921년 5월까지 배상액을 확정한다는 데에만 겨우 동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독일은 우선 200억 금마르크의 중간 지급을 해야 했으며, 독일의 하천과 운하 등 수로는 국제화되었습니다. 아울러 독일은 상선·기계·철도 장비의 상당량을 인도할 예정이었습니다.

도덕 조항에는 독일이 전쟁 발발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내용과 함께, 전황 빌헬름 2세 및 연합군이 '전범'으로 지목한 다수의 신하들을 인도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베르사유 조약(1919) 총정리 – 제1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실패한 평화 가 된 이유이 조약은 독일에서 격렬한 적개심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연합군의 최후통첩 직후 며칠간 독일 참모본부는 국가를 필사적인 군사적 저항으로 몰아넣는 방안까지 검토했습니다. 샤이데만 수상은 조약 반대 운동을 펼친 뒤 사임했으나, 결국 바이마르 의회는 조약 내용을 수용했고(1919년 6월 22일), 같은 달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홀에서 조약이 정식 서명되었습니다.

패전국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명시된 승전국의 요구를 감당할 역량이 없었습니다. '딕타트(명령)'라 불린 '굴욕의 조약'은 민족주의 선전,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선전에 먹힐 만큼 격렬한 분노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이 국가적 굴욕의 책임을 지운 독일 의회 정권은 이내 권위주의 정권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한편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연맹 창설 규약에 의해 선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자체 군사력을 갖추지 못해 결정을 집행할 실질적 권한이 없었습니다. 유럽에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던 베르사유 조약은 결국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조약은 서명 즉시 영국과 미국에서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서명 20년 후에는 첫 번째 전쟁보다 훨씬 잔혹한 새로운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민족주의의 새로운 분출을 준비시키고 말았습니다.

더 읽어볼 자료

- Jean-Jacques Becker, 『베르사유 조약』, Que sais-je(내가 무엇을 아는가), 2019.

- Jonathan D'Haese, 『베르사유 조약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놓친 평화의 연대기』, 50Minutes, 2015.

- Patrick de Gmeline, 『1919년 베르사유 – 거짓 평화의 연대기』, City Press(시티 프레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