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해리엇 터브먼: 노예제에 맞선 미국 역사의 영웅, '검은 모세'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은 19세기 미국 메릴랜드에서 노예로 태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찾아 도망쳤고, 이후 미국 역사에서 노예제에 맞서 싸운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탈출 노예를 돕던 비밀 조직인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미국 남북전쟁에도 참여해 큰 공헌을 남겼습니다.

해리엇 터브먼 생애

해리엇 터브먼은 아라민타 로스(Araminta Ross)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미국 메릴랜드주 도체스터 카운티입니다. 당시 노예들은 출생신고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출생 날짜는 알 수 없지만, 182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리엇 터브먼: 노예제에 맞선 미국 역사의 영웅,  검은 모세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는 '민티(Minty)'라는 이름으로 불린 해리엇은 노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해리엇 그린(Harriet Green), 아버지는 벤저민 로스(Benjamin Ross)였습니다. 어머니는 브로데스(Brodess) 가문의 소유 노예였고, 아버지는 자유민이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해리엇이 노예로서 처음 일하게 된 것은 걸음마 시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브로데스 가문의 이웃 집에서 주인의 아기를 돌보며 밤새 재워야 했고, 아기가 울면 안 된다는 규칙까지 있었습니다. 아기가 울어 주인 부인이 깨어나면 해리엇은 매질이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노예 생활은 해리엇에게 심각한 신체적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열두 살 무렵, 창고로 가던 길에 도망치던 노예와 마주쳤고, 그를 붙잡으려 던진 무거운 추(weight)가 해리엇의 머리에 그대로 꽂혔습니다.

이 사고로 해리엇은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을 정도의 심한 뇌진탕을 입었고, 이마에는 평생 남는 흉터가 생겼습니다. 더 나아가 심한 두통과 발작성 수면증(narcolepsy) 증세를 평생 겪게 되었습니다. 발작성 수면증은 충분히 쉬었음에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깊이 잠들어 버리는 질환입니다.

노예 시절

노예로 지내는 동안 해리엇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은 벌목꾼이었습니다. 숲에서 장작을 베어 여러 곳으로 운반하는 고된 육체노동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해리엇은 남성들에 뒤지지 않는 강한 체력과 강인함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해리엇은 노예 제도에 저항하는 기질을 드러냈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意志은 실천으로 이어져, 그녀는 변호사를 고용해 어머니의 노예 신분을 조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어머니는 45세가 되면 해방되어야 했지만 브로데스 가문이 이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844년에서 1845년 사이, 해리엇은 자유민 출신 흑인 존 터브먼(John Tubman)과 결혼했습니다. 이 무렵 그녀는 '해리엇 터브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해리엇'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터브먼'은 남편의 성에서 따온 것입니다. 개명의 진짜 의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으며, 이미 탈출을 염두에 둔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1840년대 후반, 해리엇은 자신이 브로데스 가문에 의해 팔려갈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미국 남부로 팔려가면 가족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위기감이 컸고, 소유주 에드워드 브로데스의 죽음은 팔려갈 가능성을 더욱 현실적인 위협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해리엇은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형제인 벤과 헨리를 설득해 함께 떠나자고 했습니다. 남편에게도 뜻을 밝혔지만 남편은 거부했습니다. 벤과 헨리는 동의했고, 세 사람은 자유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형제들이 해리엇을 강제로 데리고 돌아오면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리엇은 홀로 다시 도망쳤고, 이번에는 마침내 자유를 손에 넣습니다.

자유의 시절

해리엇 터브먼은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덕분에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도는 노예들이 노예제가 금지된 북부 주나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는 캐나다로 피신할 수 있도록 돕던 비밀 조직이었습니다.

이 네트워크에는 노예들의 위험한 여정을 도울 비밀 은신처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해리엇은 이 비밀 통로를 통해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가사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안전하게 정착한 지 약 1년 후, 해리엇은 인생을 바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녀는 가족을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기 위해 메릴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가족들을 자유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해리엇은 지하철도의 안내자로 활동하며 탈출 노예들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활동은 극도로 위험했으며, 붙잡히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엇은 지하철도 최고의 안내자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850년대 내내 수십 차례의 여정을 감행해 수십 명(일부 자료에서는 수백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고, 가족의 자유도 확보했습니다. 터브먼 가족은 처음에는 캐나다에 정착했다가, 나중에 해리엇이 살던 뉴욕주 오번(Auburn)의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지하철도 안내자로서 해리엇의 명성은 하늘 높이 치솟았고, 노예 소유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해리엇은 이집트에서 히브리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성경 속 인물 모세에 빗대어 '검은 모세(Black Moses)'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말년

해리엇 터브먼은 미국 남북전쟁(1861~1865)에 참여한 것으로도 미국 역사에 확실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이 전쟁이 미국의 노예제를 종식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고, 북부 연합군(Union) 진영에 서서 활동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첩자로 활동하며 남부 연합군의 부대와 시설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863년이었습니다. 해리엇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대를 직접 이끌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남부 연합 농장들을 공격했고, 이 작전으로 700명이 넘는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해리엇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에 계속 헌신했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서프러제트 운동)을 적극 지지했고, 자선 단체 활동도 이끌었습니다. 말년은 뉴욕주 오번에서 보냈으며, 1913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군인다운 예우, 즉 군례로 거행될 만큼 국가적 영웅으로 추모받았습니다.

오늘날 해리엇 터브먼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국 20달러 지폐에 초상화를 새기는 계획이 논의되는 등, 그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