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17년 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은 에트루리아의 트라시메노 호수 기슭에서 로마군을 완벽하게 매복시켰습니다. 안개에 가려진 협곡과 호수 사이에 갇힌 로마군은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지휘 아래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로마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 중 하나를 당하고 맙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로마사』에 남긴 기록은 그날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집정관을 노리는 칼끝
전투는 약 세 시간 동안 사방에서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어느 곳보다 집정관 주변이 가장 치열하고 격렬했습니다. 정예 병사들이 그를 따랐고, 그 역시 아군이 밀리거나 곤경에 처한 곳이면 어디든 직접 달려가 도왔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갑옷은 곧 표적이 되었습니다. 인수브리아 출신의 기병 두카리우스는 얼굴만으로 집정관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동포들에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이 바로 우리 군단을 학살하고 우리 땅과 도시를 유린한 자다!” 말에 박차를 가해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한 그는, 위협적인 진격 앞을 막아선 시종의 목을 벤 뒤 창으로 집정관을 꿰뚫었습니다. 시신의 갑옷을 벗기려던 순간, 로마군 최후의 방패인 트리아리이(triarii)가 방패로 그를 밀어내며 지휘관의 시신을 끝까지 사수했습니다.
공포에 몰린 패주
지휘관을 잃자 수많은 로마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극한의 공포 앞에서는 호수도 산도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좁은 샛길과 험한 절벽을 눈앞이 캄캄한 채 아등바등 내달렸고, 무장을 그대로 한 채 서로 부딪히며 짓밟혔습니다.
도망갈 곳이 없는 이들은 늪 가장자리의 얕은 물속으로 몸을 던져 머리와 어깨만 물 위에 드러낸 채 버텼습니다. 어떤 이들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헤엄쳐서라도 피하려 했지만, 탈출구가 없음을 깨닫거나 용기가 바닥나자 대부분 심연에 삼켜졌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자들은 간신히 언덕으로 기어올랐고, 남은 이들은 물속으로 뛰어든 적 기병의 칼날에 여기저기서 학살당했습니다.
안개 너머로 보인 참상
행운스럽게도 선두 부대의 약 6천 명은 필사적으로 적진을 뚫고 협곡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뒤에서 벌어진 일을 모른 채 높은 언덕에 오른 그들은 함성과 무기 소리만 들을 뿐, 짙은 안개 때문에 전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해가 안개를 걷어낸 뒤에야 산과 평원, 그리고 엉망이 된 로마군 진영의 참상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멀리서 자신들을 발견하면 기병이 쫓아올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신속히 군기를 뽑아 들고 자취를 감췄습니다.
‘포에니식 신의’라는 배신
이튿날 극심한 굶주림에 몰린 이들에게 마하르발이 나섰습니다. 밤사이 모든 기병을 이끌고 합류한 그는 약속했습니다. “무기를 내려놓으면 입고 있는 옷 하나만 남겨주고 놓아주겠다.” 병사들은 항복했지만, 한니발은 이 약속을 ‘포에니식 신의(Punica fides)’대로 지켰습니다. 즉, 배신으로. 항복한 6천 명은 모두 포승줄에 묶여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약 1만 5천 명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병사가 포로가 되었으며,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마저 전사했습니다. 트라시메노 호수의 재난은 로마가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파비우스 전략’이라 불리는 신중한 소모전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