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틴 루터의 생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앙을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수도사가 되었고, 교회 내부에서 생활하며 당시 교회의 여러 부패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특히 루터가 분노한 것은 면죄부(indulgence) 판매였다. 교회는 돈을 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모금된 돈은 성당 수리 등 교회 재정에 쓰이고 있었다. 루터는 처음에는 가톨릭 교회를 설득해 개혁을 이끌려 했으나 실패했다. 중요한 점은, 그의 본래 목적이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를 근대화하고 개혁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95개조 반박문 발표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이 글은 교회의 부와 특히 면죄부 남용을 낱낱이 폭로하는 내용이었으며, 파문이라는 위험을 무릅쓴 도전이었다.
당시 독일이 전쟁 중이었던 상황을 틈타, 루터는 왕의 감시에서 벗어나 종교개혁 사상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자신에게 파문을 예고하는 교황 칙서(파문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다음 해인 1521년, 깊은 신앙심을 지닌 사람이었던 루터는 자신이 정식으로 파문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1522년에는 결정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동안 라틴어로만 존재하고 사제와 수도사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반 민중도 직접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자신이 태어난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종교개혁의 새로운 사상
루터는 성직자였음에도 당시 종교 관행, 특히 로마 교황의 권위와 면죄부 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눈에 면죄부는 로마 교회가 쉽게 부를 축적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가톨릭은 인간이 평생 쌓은 선행을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반면, 개신교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믿음 자체가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은 영혼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면죄부를 비판했고, 이로 인해 루터와 교황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루터의 반유대주의
기독교가 유럽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이후, 유대인들은 만사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특히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
처음에 루터는 종교개혁이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를 더 매력적으로 보여줄 것이라 생각하며 그들의 개종을 바랐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유대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온갖 혐오를 퍼부으며 이 증오를 추종자들에게까지 전파했다.
1543년 저술한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Von den Jüden und iren Lügen)는 루터가 유대인에 대해 품은 생각과 그들이 받아야 한다고 믿은 처벌을 담은 저작이다. 여기에는 회당과 유대인 가옥 방화, 랍비의 가르침 금지와 살해 위협, 재산 몰수, 국외 추방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훗날 나치의 이념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실제로 나치즘이 독일에서 득세하던 시기, 히틀러는 루터의 저작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이를 독일 국민에게 선전했다. 당시 독일인 대다수가 루터교 신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루터의 반유대주의가 나치 시대의 반유대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혁명인가?
루터는 초대 교회 이후 축적된 권력 남용으로 인해 가톨릭교회가 부패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눈에 가톨릭교회의 이미지는 이미 탁해져 있었고, 그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한 모습을 되찾고자 했다. 또한 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황의 이익에 맞게 왜곡한다고 고발했다.
동시에 루터는 맹목적인 신앙을 문제 삼았다. 문자를 모르는 일반 가톨릭 신자들은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만 들려지는 말씀을 억지로 믿어야 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이 로마 가톨릭교회만큼 정통적인 기독교임을 주장하며, 자신과 루터교 추종자들이 단순히 가톨릭 교리를 비난하러 온 이단이 아니라고 밝히고자 했다. 그가 추구한 '진정한' 기독교는 돈이 크게 중요하지 않고,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더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신앙이었다. 루터는 또한 중세의 사상 자유 금지를 지적했다. 개인은 교회의 사상을 따를 의무가 있었고, 오직 사제에게 면죄부를 구입하는 돈만이 사후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이 가톨릭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시대에 맞게 '근대화'하여 중세의 낡은 사상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종교개혁이 어느 정도는 교황을 돕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수도사 출신 학자였던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문제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종교개혁은 시민들이 더 가까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돈이나 거짓 없이 깊고 개인적인 확신을 통해 구원받으며 기쁘게 살 수 있는 해법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개신교 사상은 일종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분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에게 사상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루터는 하나님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하나님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주목할 점은 루터가 1521년 1월 3일 파문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교회 내부의 입장에서 말했던 것이므로, 그가 증언한 내용에 대해 거짓이라고 비난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