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나폴레옹의 숙적이자 개혁 군주, 그리고 미스터리한 죽음

알렉산드르 1세(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는 1777년 12월 2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825년 12월 1일 타간로그에서 생을 마감한 러시아 제국의 황제입니다. 그는 황제 파벨 1세와 뷔르템베르크 출신 소피 도로테아(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아들로, 1801년 3월 23일부터 서거할 때까지 러시아 차르로 군림했으며, 1815년부터 1825년까지는 폴란드 국왕을 겸했습니다. 1793년에는 바덴 공작가의 루이제 아우구스테(1779~1826)와 결혼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나폴레옹의 전성기와 거의 정확히 겹쳤고, 그는 1814년의 승전이 가져다준 결말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과 수차례 충돌했습니다.

개혁 군주였는가?

알렉산드르는 스위스 출신 정치가 라하르프 등에게 프랑스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아버지 파벨 1세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유주의 사상을 키웠습니다.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는 아들 파벨을 건너뛰고 손자를 직접 후계자로 세우려 했지만, 계승 순서를 변경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노린 음모를 사전에 접했던 알렉산드르는 아버지가 단순히 폐위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음모는 결국 파벨 1세의 암살로 끝났고, 이후 그는 평생 아버지 살해의 공범이라는 의심에 시달렸습니다.

즉위 후 몇 달 안에 그는 러시아 정치의 입헌화 구상을 추진하고 원로원에 항의권(건언권)을 부여했습니다. 농노 해방에도 힘을 기울여, 특히 1818년에는 발트 지방의 농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동생 콘스탄틴의 지지를 받았던 이 개혁 노선은 막내동생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면서 버려졌고, 제국은 다시 전제 군주정으로 돌아섰습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가장 강력한 군사적 상대였습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 동맹했으나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에서 참패했고, 아일라우 전투(1807)의 치열한 공방 끝에 프리트란트(1807)에서 다시 패했습니다. 틸지트 조약(1807)과 에르푸르트 회담(1808) 이후에는 프랑스 편에서 영국·스웨덴과 싸워 핀란드를 병합했지만(프레데릭스함 조약), 이윽고 오스만 제국과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하며 진영을 바꿨습니다. 이 동맹 전환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고,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했음에도 이 원정은 1812년 11월 29일 베레지나 전투에서 러시아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종교 면에서 알렉산드르는 1814년경부터 신비주의적 위기를 겪으며 감리교 성격을 띤 '성경회' 운동에 경도되었습니다. 1825년, 서거 몇 달 전에는 부관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 레오 12세에게 정교회를 버리고 러시아를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했습니다.

논란에 싸인 죽음

알렉산드르 1세는 1825년 12월 1일 아조프해 연안의 타간로그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발표되자마자 러시아 각지에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조문객들이 시신 앞을 지나면서도 황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증언이 여럿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황제는 죽음을 가장하고 속세를 떠났으며,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한 병사의 시신으로 바꿔치기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습니다.

몇 년 뒤 실제로 '표도르 쿠즈미치'라 불리는 은둔자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렉산드르 1세로 여겨졌습니다. 체포되어 채찍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된 그는 스타레츠(영적 장로)가 되었고, 1864년 1월 20일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표도르 쿠즈미치와 황제가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은 일부 역사학자들이 수용하고 있으며, 로마노프 가문 내부에서도 받아들여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학자들은 알렉산드르가 스스로 속세를 떠난 것은, 제정이 돌아간 황제로 몰린 아버지 파벨 1세를 암살하려던 음모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연루된 살해를 속죄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합니다.

이 소문은 지금까지도 확인되지도 반박되지도 않았습니다. 시신 대체에는 여러 현실적 장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황후 옐리자베타 알렉세옙나는 결핵을 앓고 있었고, 황제가 죽음을 앞둔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떠났을 리는 없다는 지적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의문을 더 짙게 만드는 요소도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가 생존설 검증을 위해 알렉산드르 1세의 무덤을 열었을 때, 관은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