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ENEUVE, Pierre-Charles de (Valensole, 1763년 12월 31일 - Rennes, 1806년 4월 22일).
16세에 해군에 입대해 ' 미국.
그는 고귀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대의를 이어 프랑스에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1793년 대위, 1796년 후방 제독이 된 그는 브루이스 제독의 지휘 하에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으며, 아부키르 해전(1798년 8월 1일)에서 프랑스 함대의 우익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이 재난에서 두 척의 전열함과 두 척의 호위함을 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생존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802년 윈드워드 제도에 주둔한 해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1804년에 그는 툴롱 함대 사령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제도 침공으로 이어질 대작전 계획을 실행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지브롤터 해협을 쉽게 통과한다면 마르티니크에 있는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함대를 감히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에서 구타당했습니다.
피에르 샤를 실베스트르 드 빌뇌브(Pierre Charles Sylvestre de Villeneuve)는 영국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비난에 압도되어 1806년 렌(Rennes)에서 자살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영국 침공을 준비하면서 나폴레옹 1세는 빌뇌브에게 넬슨의 함대를 서인도 제도로 유인한 후 즉시 스페인 선박과 함께 해협으로 귀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805년 6월 마르티니크에서 출항한 후 넬슨의 뒤를 이어 빌뇌브는 나폴레옹 1세가 그에게 브레스트에 합류하라고 명령했을 때 자신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카디즈로 피신했습니다. 카디스를 떠난 드 빌뇌브 제독은 트라팔가 곶에서 영국군과 충돌하여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이 해전의 패배는 프랑스에게 진정한 재앙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1806년 4월 가석방된 빌뇌브는 렌에 도착하자마자 자살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꼼꼼하지만 평범하고 우유부단한 장교에게 대담함, 심지어 천재성을 요구하는 작전을 맡기면서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빌뇌브의 이름은 개선문에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