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나무르 섬 상륙 작전 (2월 1일)
1944년 2월 1일, 마셜 제도 콰잘레인 환초 북쪽의 로이(Roi)와 나무르(Namur) 섬을 향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LVT(상륙장갑차) 부족으로 인해 전날 25해병연대가 사용한 장비를 24해병연대가 재사용해야 했던 탓에 작전이 수 차례 연기된 끝에, 영시(Zero Hour)는 오전 11시 12분으로 확정되었다.
로이 섬: 신속한 점령
첫 파도로 23해병연대 두 개 강습단이 미처 전날 투입되지 않았던 대대의 상륙장갑차를 타고 로이 섬으로 향했고, 뒤이어 24해병연대 선봉대가 LVT로, 후속 부대가 카누로 상륙했다. 구축함과 로켓 발사기를 장착한 LCI(보병상륙정)의 집중 포화에 선두의 장갑 LVT가 큰 피해 없이 해안에 도달했다. 이 폭격에 완전히 압도된 일본군 방어병력은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고, 상륙 직후 지휘관은 슈미트 장군에게 "가스 상태다! 해변에 저항 없음... 신호만 주면 섬 나머지를 점령하겠다"는 유명한 보고를 전했다.
일부 전차와 보병이 과도한 열의로 일본군과 접촉하려다 아군 함포 사격권 안으로 들어가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부대를 재정비한 뒤 질서 있게 진격하여 오후 6시에는 섬 반대편 해안에 도달했다. 슈미트 장군은 이 시점에 로이 섬이 완전히 확보되었음을 선언했다.
나무르 섬: 치열한 시가전과 비극적 사고
나무르 섬의 상황은 달랐다. 로이의 넓은 비행장 지대와 달리 나무르는 빽빽한 야자수 숲으로 덮여 있었고, 사전 포격으로 쓰러진 야자수와 무너진 건물, 참호가 뒤엉켜 저격수와 잔존 병력의 완벽한 은신처가 되었다. 해변에서 저항을 받지 않았던 24해병연대 강습단이 내륙으로 진입하려 하자, 장갑 LVT들이 해안의 대전차 참호와 수풀에 발이 묶여 화력 지원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전차들이 곧 상륙하여 수풀을 헤치고 보병을 지원했다.
순조롭게 진격하던 중 비극이 일어났다. 폭파반이 어뢰 탄두가 쌓인 토치카에 폭약을 투하했는데, 엄청난 폭발로 "컨테이너만 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야자수 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해병 20명이 즉사하고 100명이 부상당했으나 공격은 잠시 중단된 뒤 예비대가 투입되어 기세를 이어갔다. 해 질 무렵 연대는 섬의 4분의 3을 확보했으며, 섬 폭은 겨우 1km 남짓이었다.
그날 밤 몇 차례 일본군의 반격이 있었으나, 2월 2일 오전 로이 섬에서 도하한 추가 전차 지원을 받아 진격을 재개했다. 일본군은 미미한 병력으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전날 저녁부터 현지에 지휘소를 둔 슈미트 장군이 오후 2시 18분 나무르 섬의 저항 종식을 선언했다.
콰잘레인 섬 남부 작전 (2월 1일~4일)
남쪽 콰잘레인 섬에서도 작전은 순조로웠다. D-데이에 인근 소도서 예비 상륙으로 항로와 포병 진지를 확보한 뒤, 105mm와 155mm 곡사포 4개 대대가 함포 및 항공 지원에 가세하자 효과는 가공할 정도였다. 한 목격자는 "1만 미터 상공에서 섬을 들어 올려 떨어뜨리는 듯하다"고 묘사했다.
2월 1일 상륙 및 초기 진격
2월 1일, 로이-나무르 때와 같은 패턴으로 철저한 사전 포격 후(이번엔 LVT 혼잡 없이) 32보병연대와 184보병연대가 콰잘레인 섬 서쪽 끝에 상륙했다. 폭 800야드(약 730m)에 불과한 좁은 해변 탓에 대대별로 종대로 상륙할 수밖에 없었으나, 두 연대는 신속히 교두보를 확보하고 확대했다. 울창한 수풀과 잘 은폐된 적의 저항이 거세지자 병력은 중앙의 미완성 비행장까지 진격한 뒤 야간 방어를 위해 참호를 팠다.
야간 침투전과 느린 진격
어둠 속에서 포격과 화염방사기를 견뎌낸 소수 일본병이 미군 전선과 후방으로 기어들어와 기습을 가했다. 이튿날 밤에도 같은 양상이 반복되어,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뻗은 섬(약 4km)을 따라 미군은 매우 느리게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점령 및 결과
하지만 포병, 함포, 항공기의 끊임없는 타격 속에 일본군은 제7보병사단의 증강된 압력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2월 4일 32연대가 섬 끝단에 도달했고, 해안에 지휘소를 둔 콜렛 장군이 오후 4시 10분 임무 완수를 선언했다.
작전 평가 및 전과
2월 8일, 터너 제독은 작전 결과를 평가했다. 마셜 제도의 핵심 전략 거점을 확보했으며, "구식" 일본군 기지는 미군 폭격 연습 표적이 되었다(그다지 좋은 표적은 아니었다). 콰잘레인 방어전에서 일본군은 8,386명 전사(북부 3,563명, 남부 4,823명)했다. 제4해병사단은 전사 313명, 부상 502명; 제7보병사단은 전사 173명, 부상 793명이었다. 길버트 제도 전투에 비해 적 전사자는 2배 늘었고, 미군 피해는 절반으로 줄었다. 스프루언스 제독의 장병들은 교훈을 확실히 체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