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9월 20일, 생트메느울과 발미 사이 샹파뉴 평원에서 프랑스 혁명군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 간의 결정적인 대치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갓 태어난 프랑스 공화국이 유럽 왕정들의 협공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가른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역사적 배경
1792년 4월 20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시작된 혁명전쟁은, 그해 8월 반혁명 세력의 본격적인 침공으로 확대되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대리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15만 명의 연합군(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헤센군)과 2만 명의 왕당파 망명군이 덩케르크에서 스위스까지 전 전선에 걸쳐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8월 12일 프로이센 선봉대가 프랑스 영토에 진입했고, 19일 마르슈알 뤼크네르가 퐁투아에서 오스트리아군 2만 2천의 공격을 용맹히 막아냈으나, 20일 베르됭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파리로 가는 길이 열렸다. 위기감이 고조된 프랑스는 로샹보, 라파예트, 뤼크네르의 3개 군단을 뒤무리에즈와 켈레르만 두 장군 휘하로 재편했다.
전투 전야: 아르곤 숲의 기동전
8월 23일 3일간의 포격 끝에 롱위가 함락되고, 베르됭마저 9월 3일 항복했다. 베르됭 지휘관 보레르 대령은 항복을 주장하는 전쟁회의에 반발해 자결했고, 젊은 마르소 대위는 "패전을 갚을 또 다른 칼을 달라"며 끝까지 저항하다 포로가 되었다.
9월 2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베르됭을 점령하고 8만 대군을 이끌고 샹파뉴 평원을 가로질러 파리로 직진하려 했다. 그러나 뒤무리에즈가 발랑시엔에서 벨기에 침공을 준비하던 병력을 급히 아르곤 숲으로 이동시켜 파리 진격로를 차단했고, 메스에 있던 켈레르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켈레르만이 9월 19일 생트메느울에서 뒤무리에즈와 합류하면서 양군은 발미 풍차 언덕 일대에 진을 쳤다.
전투 진행: 안개 속의 포성
9월 20일 새벽 3시, 짙은 안개 속에서 프로이센 선봉대(호엔로에-징겔핑겐 공자 지휘)가 켈레르만 군의 전초부대(데프레-크라시에 장군 지휘)와 한스 마을 근처에서 충돌했다. 이는 단순한 정찰전이 아닌 본격적인 결전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전 7시경 안개가 걷히자 쌍방 포병전이 시작되었다. 그리보발 시스템으로 정비된 프랑스 신형 포병이 위력을 발휘했다. 오전 10시경 켈레르만 장군의 말이 포탄에 맞아 죽고, 탄약고가 피격되어 두 문의 포탄 마차가 폭발하는 위기가 닥쳤다. 당황한 마부들이 마차를 몰고 도망치면서 포탄 공급이 끊기고 사격이 약해지자, 일부 보병이 후퇴하며 혼란이 가중되었다. 켈레르만은 직접 나서서 전열을 수습하고 원위치로 되돌렸다.
결정적 순간: "동포여, 이곳이 승리의 순간이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포병전만으로 프랑스군을 흔들 수 없자 정오 무렵 세 개의 공격 종대를 편성해 측면 기동(사선 대형)을 시도했다. 좌익 두 개 종대가 발미 풍차 언덕으로, 우익 한 개 종대는 거리를 두고 전진했다. 이는 프로이센군의 전형적 전술이었다.
켈레르만은 가만히 있으면 사기가 꺾인다고 판단, 대대 종대로 전진을 명령했다. 병력을 돌며 외쳤다. "동포여, 이곳이 승리의 순간이다! 적군이 다가오도록 단 한 발도 쏘지 말고, 총검으로 돌격하라!"
4시간 포격으로 단련된 병사들은 "국가 만세!"를 외치며 화답했다. 켈레르만은 자신의 모자를 군검 끝에 꽂아 흔들었고, 순식간에 모든 병사들의 모자가 총검 위에 올랐다. 거대한 함성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이 예상치 못한 기세에 프로이센 종대들은 멈칫했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켈레르만의 외침과 함께 프랑스 포병이 재차 맹포를 퍼부어 프로이센 선두를 무너뜨렸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퇴각을 명령했다.
전투의 끝과 의문
오후 4시까지 포격이 이어졌고, 오후 7시경 연합군이 재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프랑스군의 당당한 태도와 함성에 다시 물러났다. 연합군은 초진지로 돌아가고 전장엔 시신만이 남았다. 프랑스군 300명, 프로이센군 184명 전사라는 놀라울 정도로 적은 사상자였다.
프로이센의 갑작스러운 퇴각을 두고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당통에게 매수되었다는 설(9월 16일 왕관 다이아몬드 도난 사건 연관), 이질(덜 익은 포도 섭취)과 악천후, 그리고 폴란드 분할을 위해 러시아-오스트리아가 움직이면서 프로이센도 병력이 필요했다는 정치적 계산 등이 거론된다.
결과와 역사적 의의
9월 21일 파리에 승전보가 닿자, 국민공회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켈레르만은 부아몽 고지로 이동해 전선을 굳혔고, 10월 22일 연합군은 프랑스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발미 전투는 '무장한 시민' 신화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보발 포병의 우위와 시민군의 애국심이 노련한 프로이센군을 물리쳤음을 증명한 이 전투는, 이후 징병제(국민개병제)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켈레르만은 이날 조국을 구했고,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주체임을 깨달았다.
주요 참전 인물
프랑스군 측
-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1735-1820): 장군, 전투 전반 지휘
-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즈 (1739-1823): 장군, 아르곤 기동으로 진격로 차단
- 피에르 리엘 드 뵈르농빌 (1752-1821): 중장, 뒤무리에즈 선봉 지휘
-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 (1773-1850): 소장, 훗날 프랑스 국왕(7월 왕정)
- 피에르 클로드 파졸 (1772-1844): 중위, 훗날 원수
- 쇼데를로 드 라클로 (1741-1803): 전쟁성 위원, 군제 개편으로 승리에 기여 (『위험한 관계』 저자)
- 벤자민 지크스 (1772-1811): 대본영 제도병, 전투 스케치 남김
연합군 측
-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1735-1806): 프로이센 원수, 연합군 총지휘
- 샤를 조제프 드 크루아, 클레르페 백작 (1733-1798): 오스트리아군 1만 2천 지휘
- 루이 드 프로테 (1766-1800): 망명군 대령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1832): 독일 문호, 작센-바이마르 공작 수행원으로 참관. 훗날 "여기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