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초등교육은 무료입니다: 프랑스 페리 법과 무상·의무·세속 교육의 탄생

1833년 기조(Guizot) 법이 불러일으킨 움직임은 팔루(Falloux) 법의 조항들과 결합되었다. 1850년 이후 공립과 사립 초등교육은 상당 부분 성직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특히 수녀들이 담당하던 여아 교육은 그러했는데, 수녀들은 교원 능력 자격증 대신 주교가 발행하는 한 통의 '순명 서한'으로 갈음할 수 있었다.

교회의 손아귀에 있던 초등교육

남학생의 3분의 1 이상이 수도회 형제회 학교에 다녔다. 노동자 계층 아동 가운데 적어도 3분의 2는 교회의 손을 통해 교육받았다고 추산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11만 명에 달하는 교사 중 레클뤼(M. Reclus)에 따르면 4만 7천 명이 수도회 소속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공교육에 종사하는 일반 교사들은 사제의 감독 아래 놓여 있었다. 무상으로 입학할 아동의 명단은 시장과 함께 작성하는 이가 바로 본당 사제였으며, 일반 교사는 수업 시간에 교리문답을 암송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농촌 지역의 초등교육은 여전히 빈약했다. 나폴레옹 3세의 교육장관 빅토르 뒤뤼(Victor Duruy)는 의무 취학제를 추진하고자 했으나, 1867년 법으로 신설 학교 1만 2천 개를 세우는 데 그쳐야 했다. 1869년의 벨빌(Belleville) 강령은 의무적이고 세속적이며 무상인 초등교육을 요구했다. 이후 온건 공화정은 교사 급여를 개선하였고, 1878년 법은 학교 재정을 지원하는 기금(Caisse des écoles)을 만들었다. 장 마세(Jean Macé)와 함께한 교육동맹은 활발한 여론 운동을 벌였다. 이제 국민교육부장관 율스 페리(Jules Ferry)가 나설 차례였다.

페리의 첫걸음: 교원 양성

페리는 먼저 '간부' 양성부터 구상했다. 폴 베르(Paul Bert)의 영향 아래 그는 1879년 각 주(데파르트망)마다 초등사범학교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때까지 67개 주에는 이런 학교가 없었다. 남자 교원을 위한 초등사범학교는 기조 법 이래 이미 존재했으므로, 페리는 8곳만 새로 세우면 되었다. 한편 초등사범학교의 여성 간부 양성을 위해 장관은 펠릭스 페코(Félix Pécaut)가 설립한 퐁트네오로즈(Fontenay-aux-Roses) 고등사범학교를 세웠고, 남성 간부 양성을 위해서는 생클루(Saint-Cloud) 고등사범학교를 창설했다.

'대작업'의 핵심, 세 개의 법안

초등학교 자체의 개혁, 곧 그 파급력이 프랑스 대중 전체에 미칠 '대작업(haute œuvre)'의 핵심이자 심장이라 할 개혁은 세 개의 법안으로 실현되었다. 이 법안들은 한꺼번에 통과시키기에는 너무 방대해 소화하기 어려웠던 폴 베르의 109개 조항짜리 거대 계획을 분할한 결과물이었다.

첫째, 교원 자격증 법안

첫 번째 법안은 초등교육 자격증에 관한 것이었다. 초등교육 교원 자격증을 필수로 요구함으로써 수녀들의 '순명 서한' 특권은 폐지되었다. 다만 상원의 수정으로 폐지가 장래에만 적용되었기에, 3만 명의 수녀는 자격 없이도 계속 가르칠 수 있었다.

순명 서한을 둘러싼 극도로 격렬한 논쟁 가운데 페리는 반대파에 돌린 한 주장, 즉 교육이란 다른 산업과 다름없는 자유산업이며 오직 소비자만이 제품의 질을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 법안은 1881년 6월 16일 법률로 제정되었다.

둘째, 무상 교육

두 번째 법안은 무상 취학에 관한 것이었다. 기조와 뒤뤼가 이미 큰 성과를 거두어, 학생의 5분의 3은 원칙적으로 매월 1~3프랑씩 내야 하는 수업료를 더 이상 내지 않고 있었다. 납부 의무를 저절로 사라지게 두어야 할까, 아니면 무상을 공식적으로 선포해야 할까? 페리는 후자를 택했다.

셋째, 의무교육

세 번째 법안은 의무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이 법안은 초등교육의 정점이라 할 '수료 증서(certificat d'études)'를 신설했고, 자녀 교육을 방임하는 부모에 대한 제재를 규정했다. 또한 팔루 법이 공립학교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부여했던 운영·감독·시찰 권한을 박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립학교의 필수 교과목 규정에서, 종전에 예정되어 있던 도덕·종교 교육을 도덕 및 시민 교육으로 대체했다.

이처럼 1881~1882년의 페리 법은 프랑스 초등교육에 무상·의무·세속이라는 세 원칙을 확립하며 근대 국민교육의 토대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