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쥘 페리의 약속, 학교의 중립은 악의적이지 않았다

139표 대 126표로 상원은 쥘 시몽(Jules Simon)의 수정안에 찬성했다. 사실 이 표결이 곧 '신을 가르칠 것인가, 가르치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라는 점은 상원도, 페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원은 상원의 수정안을 기각했고, 페리는 세 번째 법안을 철회하되 다시 상정할 여지만 남겨두었다.

변화된 정세를 활용한 페리의 반격

페리는 결국 제2 프레시네(Freycinet) 내각 시기에 그 법안을 다시 들고 나왔다. 정치적 분위기는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극좌가 '헌법 전면 개정'을 공공연히 논의하던 시절이었고, 상원은 이 위협 앞에서 떨며 페리의 보호막 외에는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리는 이렇게 변모한 상황을 능숙하게 이용해 쥘 시몽에게 승부를 걸었다. 수정안을 재차 제출했던 시몽은 이번에는 167표 대 123표로 패배하고 말았다. 페리는 토론 내내 대단히 진심 어린 태도로 한 가지를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학교의 중립은 결코 악의적인 중립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학생을 구타한 것만큼 엄중히 처벌될 것이다"

페리는 이렇게 밝혔다. "공립 교사가 자신의 학교에서 누군가의 종교적 신념에 적대하는 교육을 할 만큼 분별을 잃는다면, 그는 학생을 구타하는 비행을 저질렀을 때와 똑같이 신속하고 엄중하게 처벌받을 것이다."

마침내 의무교육 법안은 1882년 3월 28일 법률로 제정되었다. 초등학교의 중립 헌장, 즉 세속주의(laïcité)의 한 형태로서의 중립이 확립된 순간이었다.

개혁 이후의 평온한 출발

이 치열하고도 미묘한 정치적 전투의 승자였던 페리는, 자신의 개혁이 촉발한 격정을 달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1882년 가을 초등학교가 개학했을 때, 교사에 의한 교리문답 수업이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사건은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이때 확립된 것은 어디까지나 가르치는 교과 내용의 중립, 즉 교육 내용의 세속화였다는 사실이다. 교직원의 세속화는 아직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페리 개혁 이후에도 인가된 수도회 소속 교사들은 계속 공립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고, 새로 공립 교사가 되는 것도 가능했다.

교직원 세속화, 1886년 고블레 법으로 완성되다

교직원의 세속화는 그로부터 몇 년 뒤, 온건 급진파인 고블레(Goblet) 총리 아래에서 통과된 1886년 10월 30일 법률로 실현되었다. 이 법에 따라 공립학교의 교직원은 이후 반드시 세속적이어야 했으며, 지방의회는 수도회 소속 인사를 공립 교사로 임명할 권리를 잃었다. 설령 인가를 받은 수도회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속화의 속도도 학교 유형에 따라 달랐다. 남학교의 경우 5년 이내에 완전한 세속화가 이루어졌고, 여학교에서는 기존 교사가 퇴직해 결원이 발생할 때에만 세속 교사로 대체하는 점진적 방식이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