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 격추 전적
총 37기 — Fw190 10기, Bf109 11기, Bf110 7기, Me210 2기, MiG-15 6.5기
생애

1919년 6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오일 시티에서 폴란드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프랜시스 가브레스키는 노트르데임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지만, 1940년 7월 군 항공 분야에 입문하기 위해 과감히 학업을 접었다. 1941년 3월 조종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하와이 휠러 비행장에 배속되어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몸소 목격하게 된다.

1942년 10월 미국 본토로 돌아온 가브레스키는 잉글랜드에 주둔 중이던 제315 비행대대(폴란드인 부대)로 전속되어 실전 감각을 익혔다.

1943년 2월, 가브레스키는 영국 호샴 세인트 페이스에 주둔한 제56 전투비행단에 합류했다. 이 부대는 훗날 제8항공군의 핵심 전력으로 성장하는 부대였다. 그는 제61 비행대대의 지휘를 맡아 연이은 성과를 거두며 무려 28기의 확정 격추 기록을 세웠고, 제8항공군 전체를 통틀어 1위 에이스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944년 7월 20일,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대 선두에서 독일군 비행장을 저공으로 스트래핑(기관총 소사)하던 그는 너무 낮게 비행한 나머지 프로펠러가 흙더미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체 착륙한 가브레스키는 적 순찰대가 도착하기 전에 간신히 도피했지만, 식량도 물도 없이는 멀리 갈 수 없었다. 결국 5일 후 독일 농민들에게 발각되어 현지 당국에 인계되었다. 루프트바페 장교 앞에서 첫 신문을 받던 날, 그 장교는 이렇게 그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안녕, 개비! 우리는 네가 오길 한참을 기다렸다!"

전쟁이 끝난 후 가브레스키는 오하이오주 라이트 패터슨 기지에서 시험 비행사로 활동했으며, 대령으로 진급했다. 1946년 9월에는 잠시 전역하여 민간인으로 돌아갔지만, 불과 7개월 만에 미 공군으로 복귀해 제55 전투비행대대장을 맡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가브레스키는 같은 해 11월 제4 전투요격비행단과 함께 한반도 전선에 도착했다. 그는 1951년 7월 8일 첫 격추 기록을 세웠고, 같은 해 11월 30일에는 F-86E 세이버 전투기를 장비한 제51 전투요격비행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2년 4월에는 MiG-15를 격추하며 한국 전쟁에서 여덟 번째로 에이스에 오른 미국 조종사가 되었다.
프랜시스 S. 가브레스키의 정확한 격추 수는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자료는 37.5기를, 또 다른 자료는 34.5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을 모두 치른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에이스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2002년 1월 31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