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항복과 점령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달리 병사들은 즉각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고, 교전 상태임에도 큰 전투 없이 흘러간 이 시기는 '가짜 전쟁(Drôle de guerre)'이라 불렸습니다.
1940년 6월 17일,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명성 높던 원수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조치라며 독일과의 협력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침략당하는데, 먼저 북부 지역이 점령 지역으로 지정되어 1943년 11월 11일까지 유지되었고, 이후 점령은 프랑스 전토로 확대되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모든 강압 조치가 게슈타포 주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1942년 7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프랑스 경찰이 직접 조직하고 집행한 '벨도므 검거 사건(Rafle du Vél d'Hiv)'은 약 1만 3천 명의 유대인을 체포해 파리의 겨울 자전거 경기장에 수감한 뒤 수용소로 이송한 참혹한 작전이었습니다.
국내 저항 세력의 활동
같은 시기, 프랑스 내부에서는 저항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1940년 6월 18일,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장군이 런던에서 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점령자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면서 저항 운동의 막이 올랐습니다. 그는 "프랑스는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라고 외쳤습니다.
특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저항 네트워크가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리옹에는 드 골 장군의 프랑스 내 대표였던 장 물랭(Jean Moulin)이 활동했으며, '콩바(Combat)'와 '비밀군(Armée Secrète)' 같은 조직들은 열차 탈선, 독일 병사 암살, 포로 석방 등 은밀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독일에 의해 금지된 프랑스 공산당 역시 저항에 가담했습니다.
프랑스 민병대의 탄생과 만행
비시 정권은 게슈타포가 '테러 행위'라 규정한 저항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결정적 계기는 1943년 시행된 STO(Service du Travail Obligatoire, 강제 노역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는 20세에서 22세 사이의 프랑스 청년들을 독일로 보내 점령 당국을 도와 산업과 군수 생산에 동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항 운동은 더욱 거세졌고, 1943년 2월 16일 이후 대다수 징집 대상 청년들은 '마키(Maquis)'라 불리는 지하 저항 조직에 합류하여 숨어들었습니다. 바로 이들 청년들을 추적하기 위해 같은 해 창설된 것이 프랑스 민병대(Milice française)입니다.
민병대는 해방이 될 때까지 저항 세력을 끊임없이 추격했습니다. 그들은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으며, 게슈타포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를 일삼아 승슬장구하던 나치 독일의 환심을 사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