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이 가기 시작한 추축국의 지배
1943년 초, 추축국 지배의 벽에는 균열이 점점 더 많아지고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연합군은 독일 U보트(잠수함) 공격의 여파를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탈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처지에 몰렸다. 일본군의 버마와 남서 태평양으로의 진격은 저지되었으며, 독일 본토 산업 시설에 대한 폭격은 전선의 보급을 차단하거나 늦추었다.
소련 역시 항공기와 승무원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 제2전선 개설의 위협은 수많은 독일 사단을 유럽에 묶어두게 만들었고, 이는 러시아 전선에서 대규모 작전을 펼칠 여지를 크게 줄였다.
하리코프의 승리와 쿠르스크 돌출부
바로 그때 3월, 남부집단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 원수가 하리코프에서 대승을 거두며 잠시 전세가 뒤집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의 승리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소련군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돌출부가 남아 있었다.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한 거의 반원형의 주머니 형태 지대가 서쪽으로 약 120km에 걸쳐 독일 방선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고, 그 기저부의 폭은 남북으로 160km가 넘었다. 이 돌출부 안에는 약 100만 명의 병력이 웅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돌출부의 기저부를 향해 집게형 기동을 감행하면 내부의 병력을 고립·섬멸할 수 있고, 소련군 전체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폰 만슈타인은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 기동을 준비했다.
시간은 독일의 적이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시간이 발목을 잡았다. 봄철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얼어붙었던 흙길은 진창으로 변했고, 강은 불어나고 늪이 생겨났다. 황폐해진 마을들은 범람의 참상을 비추었다. 폰 만슈타인은 기갑 부대가 진창에 빠지지 않도록 후방으로 물릴 수밖에 없었고, 작전 계획이 세워지는 동안 현지는 보병만으로 경계해야 했다. 문제는 명백했다. 독일군이 순수한 방어 자세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련군은 그만큼 빨리 돌출부를 확장하고 독일 전선을 완전히 돌파하려 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신속한 행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시기에 독일군은 망설였다. 히틀러는 마음을 바꾸었고, 장군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엇갈린 의견, 지연된 결단
유럽 전황에 대한 요구를 두고 상반된 해석이 난무했다. 돌출부 소거 이후 돈강 방면 재공세와 모스크바 진격이라는 새로운 공세의 전망조차 퓌러(히틀러)의 결단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전차를 비롯한 중돌격 무기, 특히 티거와 판터는 예상된 물량만큼 군에 인도되지 않은 상태였다. 겨우 4월 11일에야 어느 정도의 계획이 작성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폰 만슈타인이 하리코프 이후 실행하지 못했던 계획, 즉 누구에게나 너무나도 명백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명백함은 소련에게도 똑같이 다가왔다. 소련군은 서둘러 쿠르스크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기습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승리의 유일한 해법은 어떤 방어자도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것뿐이었다. 그러한 공격은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기갑 전력을 투입해야 함을 의미했고, 전차에 대한 보병 지원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돌출부 북쪽과 남쪽 전선을 무모할 정도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히틀러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참모들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중앙집단군 사령관 폰 클루게 원수와 육군총사령부의 카이텔, 차이츨러 장군은 찬성했다. 그러나 기갑총감 구데리안과 당시의 폰 만슈타인 본인은 강경하게 반대 입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군수생산장관 슈페어가 필요한 전차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확언했고, 독일이 공세에 나서지 않으면 과도하게 넓은 전선에 분산된 국방군을 소련군의 온전한 전력이 짓눌러 버리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히틀러의 승인, '치타델레' 작전
히틀러가 망설이는 동안 바투틴 장군과 붉은 군대는 최대한 뚫을 수 없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규모 반격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쿠르스크 서쪽 지역에서 소련 기동 부대가 철수하는 모습을 담은 정보 보고서와 항공 사진이 도착하면서, 이것이 반격 준비임을 짐작케 하는 소식이 히틀러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5월 10일, 히틀러는 마침내 승인했다. 작전명은 '치타델레(Zitadelle)'였다.
퓌러는 자신의 미온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작전은 실패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