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코사크(Cossack)는 동유럽과 아시아 인접 지역에 거주하던 기마 민족 집단을 지칭한다. 폴란드어 '코자크(Kozak)', 러시아어 '카자크(Казак)', 우크라이나어 '코자크(Козак)' 등으로 불리며, '모험가' 또는 '자유인'을 뜻하는 타타르어 '쿠자크(quzzaq)'에서 유래했다. 이 용어는 1395년 루테니아 문서에 처음 등장한다. 카자흐족(Kazakhs)이나 하자르족(Khazars)과는 지리적 근접성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초기 역사와 자포리자 코사크
자포리자 코사크의 형성
최초의 코사크는 몽골 침입 이후 인적이 드문 우크라이나 초원을 배회하던 자유인들이었으며, 명목상 리투아니아 대공의 권위 하에 있었다. 1303년 '쿠마누스 법전(Codex Cumanicus)'에는 타타르의 약탈로부터 행렬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경비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곧 타타르와 결탁해 행렬을 습격하는 약탈자로도 변모했는데, 이것이 자포리자 코사크의 기원이 되었다.
사회 구성과 생활상
자포리자 코사크는 부크 강과 드네프르 강 사이 '야생의 들판(Wild Fields)'에 정착했으며, 1569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 이후 폴란드 왕의 명목상 통치를 받았다. 이곳에는 영주의 의무를 피해 도망친 농민, 도시 빈민, 모험가, 귀족 출신, 심지어 범죄자까지 다양한 계층이 모였다. 젊은 폴란드 귀족들에게 코사크 생활은 빠른 군사적 경험을 쌓는 기회였다.
민족적으로는 키예프 공국(현 우크라이나) 주민과 벨라루스인이 주를 이뤘으며, 폴란드인(약 10%), 몰다비아인, 타타르인, 나아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각지의 모험가들도 합류했다. 국적과 종교를 불문하고 기존 신분을 버리고 코사크의 삶을 선택한 모든 이를 포용했으며, 17세기 초에는 유대인 코사크 집단까지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농업과 목축을 시도했으나, 타타르의 빈번한 약탈로 작물과 재산이 파괴되자 군사적 형제단으로 조직화했다. 이들은 사냥, 어로, 타타르 습격을 통한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드네프르 강 급류 하류의 말라 호르티치아 섬에 첫 번째 '시치(Sich, 요새화된 진지)'를 건설했다. '자포리자(Запорожье)'라는 명칭은 '급류 너머(za porohy)'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군사 제도와 전투 방식
코사크는 직접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총회(라다, Rada)에서 군 지도자를 선출했다. 최고 지도자는 '오타만(otaman)' 또는 '헤트만(hetman)'이라 불렸다. 원정 실패 시 오타만은 엄중한 책임을 져야 했다.
전투 시에는 마차를 연결해 삼각형 진새(바겐부르크)를 구축하고, 긴 창과 화기, 소형 대포로 타타르 기병의 돌격을 격퇴한 뒤 기병이 나와 사브르와 도끼로 마무리하는 독자적 전술을 구사했다. 이후 폴란드 귀족의 중무장 기병대도 코사크 부대 앞에서 연거푸 패배했다.
또한 노를 저어 움직이는 소형 선박으로 흑해 연안을 누비며 콘스탄티노플까지 원정을 감행하는 등 탁월한 항해술도 보유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갈등
16세기 폴란드 정부는 코사크를 공식 등록(register) 제도로 편입하려 했다. 초원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었으나,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시기 등록 코사크는 500명에 불과한 반면 실제 병력은 1만 명에 달했다. 미등록 코사크는 폴란드 귀족의 농노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고, 이는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Chmielnicki)가 이끈 대반란을 비롯한 반복적인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1648년 당시 우크라이나 전역이 '코사크의 자유'를 내걸고 봉기했으며, 자칭 코사크는 10만~20만 명에 달했으나 실제 무장 병력은 5만 명을 넘지 않았다.
러시아 코사크와 시베리아 진출
돈 코사크의 형성과 국경 수비
16세기 초부터 러시아 코사크는 모스크바 국경 지대에서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 타타르 및 트란스볼가 부족의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도네츠 강과 돈 강 사이 지역에는 농민 출신 사냥꾼, 어부, 목동들이 타타르를 상대로 원정을 벌이며 돈 코사크 공동체를 형성했다.
시베리아·캅카스·중앙아시아 정복의 선봉
러시아 코사크는 16~19세기 러시아의 시베리아(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 캅카스, 중앙아시아 확장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지리학자, 상인, 탐험가, 측량사 등 러시아 원정대의 길잡이로도 활약했다.
16세기 말 서시베리아 코사크는 토볼스크, 베레조프, 수르구트, 타라, 옵도르스크, 나림 등의 도시를 건설했다. 17세기 초 예니세이 강에 도달했으며, 미하일 로마노프 치세(1613~1645) 동시베리아 코사크는 예니세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야쿠츠크를 세우고 태평양 연안에 이르렀다. 1645년 바실리 포자르코프가 아무르 강을 건너 사할린 북부 해안을 발견했고, 1648년 세미온 데즈네프가 아나디르 강 하구(추코트카 반도)에 도달해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해로(베링 해협)를 발견했다. 1697~1699년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가 캄차카 반도를 탐험했다.
러시아 내 주요 코사크 군단(호스트)
러시아 제국 시기에 공식화된 코사크 군단(호스트)은 크게 자생적 기원의 3개 군단과 차르가 창설한 국경 수비 군단으로 나뉜다.
자생적 기원의 3대 군단
- 돈 코사크(Don Cossacks) - 1570년 등장
- 우랄 코사크(Ural Cossacks) - 1571년 등장
- 테레크 코사크(Terek Cossacks) - 1577년 등장
이 세 군단은 외부 명령이 아닌 현지 주민들의 자발적 결집으로 형성되었다.
차르에 의해 창설된 국경 수비 군단
- 쿠반 코사크(Kuban Cossacks) - 1696년
- 오렌부르크 코사크(Orenburg Cossacks) - 1744년
- 아스트라한 코사크(Astrakhan Cossacks) - 1750년
- 시베리아 코사크(Siberian Cossacks) - 1760년
- 트란스바이칼 코사크(Transbaikal Cossacks) - 1851년
- 아무르 코사크(Amur Cossacks) - 1858년
- 세미레체 코사크(Semirechensk Cossacks) - 1867년
- 우수리 코사크(Ussuri Cossacks) - 1889년
근현대사의 굴곡과 부활
19세기 들어 코사크는 차르 체제의 '충직한 경비병'으로 자리 잡았으나, 소련 정권 수립 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혹독한 탄압과 강제 이주, 문화 말살 정책을 겪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야 코사크 문화와 정체성이 부활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민족 문화 단체와 준군사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