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마찬가지로 국왕의 권위와 종교를 매개로 집단을 하나로 묶어 통합했습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듯이,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보다 더 빠르게 국왕 중심의 통일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신 라(Ra)를 중심으로 한 종교가 믿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이집트에 등장한 왕조들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집트 최초의 국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집트의 국왕은 '파라오'라고 불렸으며,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받는 신권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국왕은 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소수의 사제와 관리들에게 하사하여 나라를 운영했지만, 그 외 대다수 백성들은 세금에 묶여 있었고 자유로운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피라미드는 바로 이러한 신분 체계 속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건설했습니다. 쿠푸 왕의 무덤으로 유명한 피라미드의 건설은 곧 '국왕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과거에는 노예를 강제 동원해 지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습니다. 일본의 고분 시대에 고분 축조가 공공사업의 성격을 띠었듯이, 이집트에서도 피라미드 건설은 농한기(농사 외의 여유 기간)에 이루어지는 공공사업의 일환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첫 번째 전성기, 고왕국 시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같은 거대 건축물을 세울 만큼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던 것이 바로 고왕국(Old Kingdom)입니다. 고왕국은 멤피스(Memphis)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번영했습니다.
고왕국은 무려 500년 가까이 통일 왕조를 유지했지만, 시대가 끝나갈 무렵 관료제가 비대해지면서 재정에 큰 부담을 주기 시작합니다. 또한 초기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피라미드도 후기로 갈수록 점점 조잡해지고 붕괴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업무 효율을 개선하려다 관리 수가 늘어나 재정이 악화되었다
- 공공사업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 숙련된 전문 인력을 최소한으로만 고용하려 했다
농한기 공공사업 역할도 겸하고 있던 터라, 고용 인원과 사업 규모를 줄이면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늘어나 치안이 나빠지고, 세수 역시 악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치안이 나빠지거나 국가의 통제력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마음을 의지할 무언가'를 갈구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고왕국 말기에는 태양신 라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저승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Osiris)에 대한 신앙이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 오시리스 신앙이 본격화됨
- 공공사업의 부활
이 두 가지가 거대 건축물 재건의 원인 중 하나였고, 그만큼 채석장 운영, 구리 채굴, 석재 확보 등이 예전보다 많이 필요해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미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에서는 아카드(Akkad)가 통일 국가를 세운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건축에 쓸 자재를 확보하려면 아카드와, 그 앞길에 있는 시나이 반도·팔레스타인과 협상해야 했습니다. 수요가 커질수록 상대방은 더 비싼 값을 요구할 것이므로 협상은 어려워졌고, 결국 군사 원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실제로 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타인과의 무역 교섭뿐 아니라, 군사 원정을 반복한 흔적이 현대까지 남아 있으며, 이러한 원정은 재정 악화에 더욱 불을 지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왕국의 정치 체제는 권력을 잃고 통제력이 결핍되었고, 각 지역의 주(州)와 관리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고왕국 다음으로 번영한 중왕국이란?
고왕국이 몰락하면서 이집트 중심부의 멤피스가 쇠퇴하자, 권력의 중심은 상이집트(나일강 상류)의 테베스(Thebes)로 옮겨갑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지배하던 아카드는 중왕국(Middle Kingdom) 시대 중반에 멸망하지만, 우르 제3왕조와 아시리아 왕국처럼 선진 기술을 계승한 강력한 왕국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고왕국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군사 원정까지 벌였지만, 중왕국은 메소포타미아 및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시리아와 무역을 중심으로 한 교류와 공존을 지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Nubia)에 대해서는 영토 확장을 게을리하지 않고 지배해 나갔습니다.
또한 시리아와의 교역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나일강에서 고대 이집트에 존재했던 카룬호(현재의 카룬 호수로 그 흔적이 남아 있음)로 이어지는 수로를 확장하고, 그 주변의 카룬 지역을 개간하여 이집트 최고의 곡창 지대 중 하나로 만들어 국력을 키웠습니다.
이집트 문학이 탄생한 시기도 바로 중왕국 시대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성기를 맞았던 중왕국에도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내부적으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왕권은 순식간에 약화됩니다. 그 사이 아나톨리아에서는 히타이트(Hittite)가,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에서는 바빌론 왕조가, 더 동쪽의 이란에서는 카사이트(Kassite)가 각각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お아마도 이러한 강대국들의 성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자리를 잃은 유목민, 이른바 힉소스(Hyksos)가 이집트를 침입하여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고 맙니다.
힉소스를 축출한 신왕국의 탄생
기원전 16세기에 등장한 신왕국(New Kingdom)은 중왕국 말기에 침입했던 유목민 힉소스를 축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이룬 시기입니다. 투탄카멘의 황금 가면과 네페르티티의 흉상 같은 눈부신 예술 작품(아마르나 미술)도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신왕국 시대, 이집트에서 조금 떨어진 아나톨리아를 거점으로 한 히타이트가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이집트 신왕국 역시 시리아로 진출해 있었으니, 두 나라가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기원전 1286년의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는 세계 최초의 군사 기록으로 남은 전투이자,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후세에 전해지는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집트는 한때 해당 영토를 차지했지만, 결국 다시 히타이트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에 있던 유목민 히브리인(스스로를 이스라엘이라 칭함)은 파라오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이집트를 탈출했는데(출애굽기, Exodus), 이들이 팔레스타인 남부에 나라를 세울 토대를 마련합니다. 나아가 히브리인과 동시에 아람인, 페니키아인 역시 도시 국가들을 세워 나갔고, 이집트 신왕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점차 그 손아귀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바다 민족(Sea Peoples)'이 갑자기 등장하여 히타이트를 멸망시킵니다. 이 바다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은 이집트 역시 침입했습니다. 이집트 신왕국은 바다 민족을 격퇴했지만, 서쪽에서 리비아인의 침입까지 겹치면서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고, 기원전 1070년경 신왕국은 막을 내립니다.
번영 이후의 이집트
신왕국 쇠퇴 이후 이집트는 다른 나라들에 대해 군사적으로 열세를 지속합니다. 남부의 누비아는 옛날에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게 되고, 메소포타미아부터 팔레스타인까지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던 아시리아 왕국의 지배도 받습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고대 이집트 왕조는 신왕국 멸망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기원전 7세기경,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란 북부의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이집트를 지배하게 됩니다. 한 번 격퇴되었지만 다시 지배당하고, 11년 후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운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에 비해 이집트 통치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파라오로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집니다. 그중 한 명이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새로운 왕조(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지만, 시리아를 둘러싼 분쟁과 로마 공화정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쇠퇴합니다. 결국 당시 지중해의 최강자였던 로마에게 패배하면서, 기원전 30년 고대 이집트의 독립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