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루실로프 공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가장 위대한 성과였다. 그러나 이 영광마저 일부 러시아 장군들의 무능함으로 인해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1916년 6월 4일 시작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의 공세는 화려하게 출발했다. 브루실로프는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최고의 지휘관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그의 계획은 갈리치아 지역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해 빈으로 하여금 전쟁에서 이탈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40개 사단과 함께한 '엘리트' 근위군
공세 초기에는 4개 러시아 야전군, 총 보병사단 40개와 기병사단 15개가 투입되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러시아 육군의 정예로 일컬어지던 차르 근위군이었다. 근위군 산하에는 제1·제2 근위군단, 근위기병군단, 제1군단, 제30군단, 제5기병군단이 예속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베조브라조프 장군은 작전 능력이 아니라 황궁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차르의 총애를 등에 업고 근위군 사령관이 된 그의 지휘 자질은 처음부터 의심받고 있었다.
독일군이라면 골랐을 최악의 공격 지점
1916년 6월 28일, 근위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목표는 코벨(Kovel) 방면이었다. 그런데 근위대에게 내려진 공격 지점은 도저히 돌파가 불가능한 지형이었고, 당시에는 '지휘관이 아니라 독일군이 골라준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습지와 울창한 숲은 병력 전개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병사들은 적 기관총이 겨눠진 좁은 통로로만 진입할 수 있었고, 적 포병에게는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근위대는 분전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당시 러시아 주재 영국 무관 알프레드 녹스(Alfred Knox) 소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상황은 처참하다… 부대 배치는 엉망이다. 좁은 통로 외에는 습지를 건널 길이 없다. 제30군단은 원래 3만 명이었는데 이제 1만 명만 남았다… 제1군단 역시 1만 명이 남았다. 근위대의 손실은 3만 명으로 추산된다.”
측면 공격을 거부한 '명예'의 대가
정면 돌격에서 피해가 누적되자, 제1 근위군단을 지휘하던 파벨 대공에게는 측면 공격을 실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는 측면 공격이 “자신과 근위대의 명예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이를 거부하고 정면 돌격을 강행했다.
근위 경보병연대와 표트르 대제가 창설한 유서 깊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는 예상대로 늪지 속에서 적화에 갈려 나갔다. 일부 근위병들은 습지에 몸을 숨기며 적 진지에 살금살금 접근하려 했으나, 적의 포격과 항공기가 그들을 쓸어버렸다. 나머지 병력들은 적이 미리 표정해 둔 통로 사이 진창에 발이 묶인 채 기관총 세례를 받으며 무의미하게, 부당하게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많은 병사들이 늪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연계 부족 탓에 러시아 포병마저 아군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포수들은 제1 근위군단이 측면이 아닌 정면에서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근위대는 적 진지 일부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손실은 지휘 병력의 50%를 넘어섰고, 전사·부상·실종자만 5만 5천 명에 달했다. 일부 부대에서는 손실률이 70%를 웃돌았다.
녹스 소장의 증언은 참극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경보병 연대의 공격 소식을 들었다. 선택된 공격 지점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부적절한 곳이었다. 병사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이 있는 늪을 헤엄쳐야 했다. 손실은 70%로 추산되지만, 밀집 대형으로 기동하는 버릇 때문에 실제로는 더 컸다… 부상자들은 늪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고,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해임은 했지만, 처벌은 없었다
결국 베조브라조프와 파벨 대공은 모두 직무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수만 명의 부하를 학살로 몰아넣은 죄에 대해 두 사람은 끝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능력이 아닌 신분과 인맥으로 지휘관을 뽑던 러시아 제정군의 구조적 병폐가 어떻게 귀중한 병력을 갈아 넣는지 보여준 전형적인 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