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 마르틴 루터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판매된 면죄부에 항의하며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했고, 이로써 종교개혁의 토대가 놓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며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1562년에 시작되어 1598년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에 서명하면서 막을 내린 종교전쟁의 시기로 이어졌습니다. 이 관용 칙령은 프랑스 내 개신교도에게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여러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1685년 10월,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철회하면서 수천 명의 개신교도가 해외로 추방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762~1765년, 칼라스 사건
주요 인물
- 장 칼라스(Jean Calas): 툴루즈의 직물 상인
-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 필명 '볼테르'로 활동한 계몽주의 사상가
재판 경위
장 칼라스는 툴루즈에서 직물 장사를 하던 상인이었습니다. 1761년 10월, 그는 자신의 가게에서 아들 마르앙투안이 목을 매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는 처음에는 아들의 자살 사실을 감추려 했습니다.
재판은 철저한 종교적 불화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가톨릭 색채가 짙은 도시 툴루즈의 고등법원(파를망)은 가족의 이웃들이 퍼뜨린 소문을 근거로, 장 칼라스가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을 살해했다고 몰았습니다. 마르앙투안은 진정한 순교자로 여겨졌고, 수천 명이 운집한 가톨릭 장례식 후 안장되었습니다.
사제의 증언조차 마르앙투안이 가톨릭에 가까워지려는 뜻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음에도, 장 칼라스는 1762년 3월 10일 공개적으로 목졸림형에 처해진 뒤 불태워졌습니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결과와 영향
- 볼테르는 칼라스 사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763년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을 출판했습니다. 유족과 변호인과 함께 조사를 거듭한 끝에 장 칼라스의 결백을 확신하게 된 그는,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에서 물려받은 불관용야말로 칼라스 가족 재판의 부당함을 낳은 원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 볼테르의 노력, 즉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의 지인들에게 사건을 널리 알리고 국왕 평의회에 재심을 청원하는 등의 활동은 결국 재심을 이끌어냈고, 1765년 3월 9일 장 칼라스는 명예를 회복하며 이 억울한 옥사는 비로소 닫히게 되었습니다.
- 칼라스 사건은 프랑스 내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오랜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프랑스에서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보장되기까지는 프랑스 대혁명과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