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830년 7월 혁명(세 영광): 프랑스 왕정복고의 종언과 7월 왕정의 탄생

혁명의 배경

  • 1814년, 헌장(Charter)과 왕정복고를 통해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지만, 선거권이 소수 유력 계층에만 주어져 민주주의의 여지는 매우 좁았습니다. 특히 루이 18세는 '백일천하(Hundred Days)'를 겪은 뒤 보나파르트파와 공화파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 1816년부터 1820년까지는 자유주의자들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극단왕당파(울트라)가 주도권을 장악했고 왕권은 스스로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 1824년 샤를 10세가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그는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군사 원정을 벌이고 교회 세력에 접근했습니다. 1830년, 왕은 자신의 지위가 안전하다고 확신했지만, 자유주의 의원들은 '221인의 항의서(Address of the 221)'를 보내 극단왕당파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했지만, 선거 결과 역시 자유주의 다수파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 1830년 7월 26일, 국왕은 생클루 칙령(Ordinances of Saint-Cloud)을 반포하여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검열을 부활시켰으며, 선거권을 제한하고 새로운 총선을 실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830년 7월 27일, 28일, 29일 — '세 영광(Trois Glorieuses)'

1830년 7월 혁명(세 영광): 프랑스 왕정복고의 종언과 7월 왕정의 탄생

주요 인물

  • 샤를 10세 (Charles X)
  •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
  • 오귀스트 비에스 드 마르몽 (Auguste Viesse de Marmont)
  •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 (Louis-Philippe d'Orléans)

혁명의 전개 과정

언론인들(그중에는 아돌프 티에르도 있었습니다)이 가장 먼저 반응하여, 새로운 의회 해산 명령의 적용을 거부했습니다.

7월 27일, 네 개의 신문이 칙령을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44명의 언론인 서명으로 항의문을 발표했습니다. 국왕은 이 신문들의 발행을 저지하기 위해 마르몽 원수가 이끄는 12,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이것이 최초의 폭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운동은 곧 파리 전역으로 번졌고,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7월 27일 밤부터 28일까지 파리는 바리케이드로 뒤덮였습니다. 이때부터 폭동은 본격적인 혁명으로 발전했습니다.

7월 28일이 진행되면서 많은 병사들이 반군 쪽으로 넘어왔고, 반군은 점점 더 잘 무장하게 된 반면 마르몽의 군대는 지쳐만 갔습니다.

7월 29일 아침, 파리는 마침내 혁명가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결과와 영향

  • 7월 30일, 샤를 10세와 궁정은 랑부예(Rambouillet)로 물러났습니다. 같은 날, 티에르를 중심으로 결집한 자유주의자들은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루이 16세의 사촌)에게 권력을 촉구했습니다.
  • 루이 필리프는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인물로, 혁명가들과 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삼색기를 내걸며 군주제와 공화제를 수정 헌장 아래 통합하겠다고 선언한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 샤를 10세는 1830년 8월 2일 루이 필리프에게 왕위를 넘기며 퇴위했습니다. 이로써 '7월 왕정(July Monarchy)'의 막이 열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