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폴레옹의 병사들, 그 험난한 삶의 기록

나폴레옹의 병사들, 그 험난한 삶의 기록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그린 프랑수아 제라르(1810년 작)의 회화. 베르사유 궁전 전투화랑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 WIKIMEDIA COMMONS

20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의 운명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는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약 250만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이 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일부는 애국심이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혹은 단순히 모험에 대한 갈망 때문에 자원입대했습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징집병으로서 추첨을 통해 소집되었고, 극도로 가혹한 군 생활 환경에 최대한 빨리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대부분은 대西洋 연안부터 눈 덮인 러시아 평원까지 대륙을 종횡으로 행군하는 보연대 소속이었습니다.

“모든 프랑스인은 곧 병사다”

제정 체제는 혁명전쟁 시기 확립된 대규모 모병 제도, 특히 “모든 프랑스인은 병사다”라는 원칙에 입각한 1798년 조르당법(Jourdan law)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법에 따라 매년 20세에서 25세 사이의 미혼 청년 수천 명이 의무 징집 또는 추첨을 통해 입대했습니다. 부유층 징집병들이 면제권을 구매하거나 대신 복무자를 고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정복 전쟁이 진행될수록 늘어나는 ‘대육군(Grande Armée)’의 인력 수요를 충족시켰습니다.

새로운 신병들은 평시에는 1년에서 5년, 전시에는 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습니다. 무기를 들기 전에 예비 연대의 훈련소 중 한곳에 배속되어 군사 훈련을 받고 군복을 입으며 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실전 캠페인에 합류하여 베테랑들과 어우러졌고, 이러한 과정은 군대를 제2의 가족처럼 만드는 ‘단결심(esprit de corps)’을 형성했습니다.

병사의 하루와 장비의 무게

병사들은 무거운 군복을 입고 4kg이 넘는 소총과 함께, 가득 채웠을 때 15~20kg에 달하는 배낭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규격 군복은 세 가지 치수로 제작되었으며, 대열 정돈, 가치관 함양, 부대 구분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각 병사가 지참한 배낭에는 전투용 화약과 탄환 두 묶음(전투 시 50~60발), 여벌 바지와 행군용 각반과 신발, 4일치 비스킷, 잠깃, 개인 물품 등이 들어 있어 채워진 상태의 무게는 15~20kg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나무 블록을 가공해 만든 가죽 탄약띠도 더해졌는데, 이것은 오른쪽 허벅지 뒤에 착용하고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끈으로 고정했습니다. 무장까지 포함하면, 신병이든 베테랑이든 모든 보병은 4.6kg에 달하는 1777년형 소총(9년식 개량형)을 소지해야 했습니다.

평시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들이 요새, 막사, 스트라스부르나 마인츠에 건설된 ‘전쟁 도시’, 혹은 잉글랜드 상륙 작전을 위해 파드칼레 해안 불로뉴쉬르메르 주변에 설치된 반영구 캠프 같은 곳에 머물며 지냈습니다. 병사들의 하루는 엄격한 훈련과 번거로운 위병 업무로 채워졌고, 때로는 극도로 검소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두 명의 병사가 한 겹의 짚자리를 나누어 쓰는 것은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들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급을 받았습니다. 근위대(Imperial Guard)라는 정예 부대의 경우, 척탄병은 23수(sous)를 받았는데 그중 9수는 식비, 4수는 속옷과 신발 구입에 쓰이고 남은 10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저축금이었습니다. 상등병은 33수, 하사관은 43수를 받았습니다.

하루 40km를 넘는 강행군

전시에는 병사들이 적을 놀라게 할 만큼 빠른 속도와 긴 거리의 장거리 행군에 나섰습니다. 언제든 징발에 익숙해진 신병들은 즉석에서 생계를 꾸리는 요령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가 끝나면 최선의 경우 임시 진영에 세운 천막에서 쉴 수 있었지만, 대개는 노천에서 야영하며 장작불을 피워 담요 하나로 잠드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행군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이동 거리는 보통 하루 20~30km였지만, 필요하다면 40km에 달하거나 그 이상을 넘기도 했습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전에 있었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11월 29일 오후 황제의 명령을 받은 다부 원수의 군대는 거의 쉬지 않고 130km를 강행하여 12월 2일 아침 전장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이런 가혹한 행군이 끝난 후 병사들이 “발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하소연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기야말로 승패를 좌우하다

이처럼 가혹한 생활 조건 속에서 병사들의 사기는 전투 결과를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대의 힘은 규모, 훈련, 경험, 사기에 달려 있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는 다른 모든 요소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스스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병사들의 전투 함성 “황제 만세!”는 온 유럽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적들에게조차 경외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의 숙적이었던 영국 웰링턴 공작은 병사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의 삿갓 모자가 보이는 것만으로 “4만 명의 병력을 추가한 것과 같다”고 단언했습니다.

사기 유지가 더욱 중요했던 이유는 전장이 병사들에게 학살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적의 포화 앞에서 좁은 대형을 유지한 채 몇 시간씩 싸우거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고, 전투 중의 비겁함은 사형으로 처벌되었습니다.

전쟁의 참상, 생존자들의 증언

외과의사 페르시는 1807년 2월 8일 참혹했던 에일라우 전투 다음 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이토록 많은 시체가 이토록 좁은 공간을 뒤덮은 적은 없었다. 눈은 사방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수천 정의 총, 모자, 흉갑이 길바닥이나 들판에 흩어져 있었다. 적이 방어에 유리하도록 선택한 것이 분명한 산의 경사면 아래에는 백구씩 피에 절은 시체 무리가 몇 개씩 있었다.” 회상록에서 야코프 발터는 코사크의 습격을 받으며 겨울의 모스크바 퇴각길을 걸었던 기억을 남겼습니다. “나는 수백 명씩 쓰러져 가는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 그들의 입안에 얼음과 눈이 얼어붙는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전투의 부상은 소총, 창, 검, 혹은 포격(포탄, 유탄)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조차 며칠간의 고통 끝에 사망하거나, 당시 의학의 한계로 인해 불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생존자 다수는 이후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습니다.

워털루 이후, 대육군의 해체

1815년 워털루 패배와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이후 대육군은 해체되었습니다. 황제를 위해 수년간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들은 왕정복고를 이룬 루이 18세의 새로운 군대에 입대하든가, 아니면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더 읽을거리
《투덜대는 자들의 말, 1792-1815: 대육군의 미공개 편지》, 제롬 크루아예 지음, 가우센 출판사, 2016.

제국의 훈장

공로주의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나폴레옹은 1802년에 설립한 레지옹도뇌르(Legion of Honor) 같은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병사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병사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이 서훈은 전장에서의 영웅적 행동이나 국가에 대한 뛰어난 공헌을 포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들, 나폴레옹의 또 다른 군대

수많은 여성들도 대육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809년 아스펀에슬링 전투에서는 600명의 여성이 75,000명의 병사들을 지원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위생대, 종군 상인(vivandière), 세탁부 등 군수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전장에서 보여준 용기로 인해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한 장교는 회고록에서 종군 상인들에 대해 “그들은 척탄병 부대만큼 용감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아내들과 떨어져 지내던 병사들은 주둔지 마을의 여인들과의 관계에 의지하거나, 부대의 이동을 따라다니던 프랑스 혹은 외국 출신의 유녀 ‘그리제트(grisette)’들에게 의지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