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틀란트 남단의 결전지, 디퓌볼
디퓌볼(Dybbøl)은 유틀란트 반도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격전지였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이 덴마크 왕국에 편입되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덴마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864년 1월 유틀란트를 침공했다.
디퓌볼은 이미 제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1848~1851) 당시에도 격전지였던 곳이다. 덴마크군은 이곳을 요새화해 두었으나, 그 사이 포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구식화된 방벽은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1864년 4월 7일 프로이센군이 먼저 도착해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프로이센군은 병력과 화력 모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이 보유한 대포는 126문, 덴마크군은 고작 66문에 불과했다.
무기 면에서 더 치명적인 격차는 소총이었다. 프로이센 보병은 후장식 드라이제(Dreyse) 니들건 소총으로 무장해 발사 속도에서 큰 이점을 누렸다. 반면 덴마크군은 전장식 미니에·탭라이플 계열 소총을 사용해 연사력이 크게 떨어졌다.
게오르크 다니엘 게를라흐(Georg Daniel Gerlach) 장군 휘하의 덴마크군은 총 11,000명이었다. 이에 맞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는 무려 37,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디퓌볼 방어선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무거운 프로이센 포격으로부터 안전할 은폐 시설조차 부족해 덴마크 포수들은 그대로 노출된 채 싸워야 했다. 따라서 프로이센군이 최종 공세를 개시할 무렵, 방어군의 손실과 피로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덴마크군이 유일하게 누린 이점은 장갑함 '롤프 크라케(Rolf Krake)'의 존재였다. 이 함선은 해상에서 요새 방어선을 엄호하며 68파운드 포로 프로이센군을 포격해 주었다.
결전의 아침
1864년 4월 18일 새벽, 프로이센군은 총공격을 준비했다.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는 두 차례의 공격 파도를 계획했다. 첫 번째는 12,000명, 두 번째는 나머지 병력으로 구성됐다. 프로이센 포병대는 오전 10시까지 6시간 동안 8,000발의 포탄을 쏟아붓는 집중 포격을 가했다.
맹렬한 포격은 방어선에 큰 피해를 입혔고 인명 손실도 잇달았다. 덴마크군의 대포 대부분은 침묵하고 말았다. 덴마크군은 병력 약 5,000명을 방어선에 배치하고 나머지를 예비대로 남겨두었다.
포격이 멎자마자 프로이센 보병이 몰려들었다. 각 2,000명씩 여섯 개의 밀집대형이 군악대의 행진곡에 맞춰 요새를 향해 돌진했다. 덴마크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전장식 소총으로는 상대의 압도적인 물량을 막아낼 만큼 빠르게 발사할 수 없었다.
방벽 위의 격전
대신 승부를 가른 것은 프로이센의 후장식 소총이었다. 제1·2·3 요새는 과로에 지친 제22보병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제1요새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단 여섯 분 만에 함락됐다.
제2요새는 효과적으로 저항하며 두 번째 프로이센 밀집대형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또 다른 대형이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재차 공격해 왔다.
안커(Anker) 중위 지휘 아래 싸운 덴마크군은 너무나 용감하게 싸워, 전투가 끝난 후 프로이센군이 직접 그 자리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영웅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수비대원들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고, 요새는 함락되었다.
제3요새는 단 19명의 덴마크 병사가 약 1,000명의 프로이센군과 맞서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존자들이 무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적의 공격 세 번을 모두 격퇴했다. 덴마크군의 사상자는 10명에 그친 반면, 프로이센군은 123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4·5·6 요새는 제2보병연대가 방어했다. 제4요새로 돌진한 프로이센 대형은 너무나 집중적인 사격을 받아 진격이 멈춰 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여기서도 수적 우위가 승부를 결정했다. 요새는 포위됐고, 덴마크군은 총검으로 맞섰지만 오전 10시 13분, 제4요새는 프로이센군의 손에 넘어갔다.
제5요새에서도 덴마크군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공격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했다. 프로이센군이 다가오자 덴마크군 세 개 소대가 총검으로 역돌격해 수적으로 우월한 적을 일시 물리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고, 요새는 함락됐다. 제6요새는 가장 쉽게 넘어갔다. 수비대는 문자 그대로 프로이센군의 인해(人海)에 파묻혔다.
제7요새는 제17보병연대가 방어했다. 이들 역시 필사적인 총검돌격을 감행하며 혈전을 벌였지만 판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한편 게를라흐 장군은 역공을 위해 제8여단을 움직이고 있었다. 여단 하나로 군대 하나에 맞서는 셈… 3,000명이 37,000명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방벽 위의 전투는 계속됐다. 제8·9·10 요새 역시 제17보병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제8여단이 제8요새로 필사적인 역공을 감행하는 동안, 제17보병연대 제5중대는 자신들만의 서사시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28문의 포문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보병은 두 차례에 걸쳐 영웅적인 수비대를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성공한 것은 세 번째 공격에서였고, 그때는 이미 수비대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뒤였다.
제9요새는 제17보병연대 제6중대가 방어했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센군은 9대 1의 병력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덴마크군은 눈부신 전투를 벌였고, 요새는 대다수 수비대원이 영웅적으로 전사한 뒤에야 함락됐다. 제10요새는 명령에 따라 버려졌다.
제8여단의 마지막 역공
제8여단의 역공은 처음부터 결과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단은 제9보병연대와 제20보병연대 소속 두 개 대대씩, 총 네 개 대대로 구성돼 있었고 샤르펜베르크(Scharfenberg)가 지휘했다. 약 3,000명의 병력에게 오전 10시 30분경 역공 명령이 내려졌다. 공격은 순간적으로 프로이센군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적의 우위가 너무나 절대적이라 여단만으로는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단은 프로이센 후장식 소총의 탄막 속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었고, 병력의 45%인 1,400명을 잃었다. 그럼에도 여단은 덴마크군 본대와 마찬가지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프로이센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전투의 끝, 그리고 전쟁의 귀결
전투는 끝났다. 덴마크군은 약 700명 전사, 554명 부상, 3,534명 포로 등 총 4,834명의 손실을 입었다.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1,200명이었다.
이 전투와 이후의 몇 차례 소규모 교전을 거쳐 전쟁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넘어가며 막을 내렸다. 슐레스비히 북부 지역은 1920년 주민투표를 통해 덴마크로 반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