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재판(인퀴지션)에서 열린 한 심문 장면
가톨릭 교회가 특별 법정을 통해 이단을 근절하고자 설립한 교회 기구, 바로 '인퀴지션'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요? 중세 유럽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남은 이 제도의 탄생 배경을 살펴봅니다.
베로나 공의회에서 시작된 전조
인퀴지션의 씨앗은 이미 1184년 베로나 공의회에서 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카타리파와 발도파 등 이단 세력의 확산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대처할 강력한 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종교재판이 본격적인 제도로 확립된 것은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 III)의 시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이후 재판 업무는 주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처벌이 아닌 '회심'이 명분이었다
흥미롭게도 인퀴지션의 목적은 단순히 이단자를 처벌하는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들, 즉 이단자를 규탄하되,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참회를 통해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공식적인 주요 목표였습니다. 물론 실제 운영 과정에서는 잔혹한 박해가 자행되며 명분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괴리가 드러났습니다.
1252년, 고문의 공식 허용
현실은 훨씬 더 엄혹했습니다. 당대 민사 법원에서 널리 통용되던 고문은 종교재판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1252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 IV)가 교서 '아드 익스티르판다(Ad extirpanda)'를 발표하여 이 관행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기에 이릅니다. 이로써 고문은 종교재판 제도의 합법적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비극의 서막이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