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와 독일의 우정: 전쟁과 화해로 이어온 역사의 연결고리


프랑스와 독일의 우정: 전쟁과 화해로 이어온 역사의 연결고리1963년 1월 22일 샤를 드골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서명한 엘리제 조약(Élysée Treaty)은 오늘날 '프랑스-독일 우호 관계'의 초석이 되었다. 협력 조약의 체결,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다양한 기념 행사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평화적 화해의 약속을 갱신할 기회를 끊임없이 만들어 왔다. 이후 '프랑코-저먼 커플'이라 불리는 양국 관계는 유럽 연합(EU)의 '등뼈'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처럼 견고한 우정은 결코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나라가 걸어온 길은 평화를 예고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긴장과 전쟁: 서로를 향한 적대 국가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에게 극심한 증오를 품게 되었고, 이는 인명·물질·사회 전반에 걸친 참화로 이어졌다. 세 차례의 전쟁, 즉 1870년, 1914년, 1940년의 전쟁은 두 나라의 운명을 영원히 각인시켰다. 양국은 유럽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목표 아래 세 번에 걸쳐 자국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2제국의 붕괴를 겪었고, 황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도 함께 몰락했다.

이 전쟁은 독일의 영토 통합은 물론 정치적·사회적 통합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로써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 이후 프랑스-독일의 경쟁 구도는 정치 영역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20세기의 문을 여며 프랑스 사회를 드레퓌스파와 반(反)드레퓌스파로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는 일부 세력에 의해 '독일 스파이'로 몰렸다. 식민지 문제 역시 갈등의 불씨였다. 19세기 말 프랑스는 실질적인 식민 제국을 보유한 반면, 독일은 소수의 식민지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식민지에 대한 독일의 욕심은 프랑스의 보호령이던 모로코로 향했고, 그 결과 1905년 탕헤르 위기와 1911년 아디르 위기라는 두 차례의 충돌이 벌어졌다. 이 두 차례의 긴장 국면은 한때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1914년, 경쟁의 정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은 연합 체계의 지옥 같은 나선이었다. 우리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명명한 '극단(極端)의 시대', 즉 재앙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군 150만 명, 독일군 2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전쟁이 마지막 전쟁, 이른바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Der des ders)'이라 믿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체결 불과 6개월 후, 승전국들은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을 작성하기 위해 모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윌슨의 14개조 원칙'은 미국이 국제 무대에 등장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우정: 전쟁과 화해로 이어온 역사의 연결고리베르사유 조약은 배상금, 파괴된 지역의 복구 부담,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에 의한 부유한 광산 지역 루르의 착취라는, 독일에게 극도로 가혹하거니와 사실상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을 강요했다. 윌슨 대통령은 승전국들, 특히 프랑스가 제재 수위를 지나치게 넘고 있다고 분명히 지적했지만 아무도 그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얼마 후 포슈(Foch)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20년간의 휴전일 뿐이다"라고 단언했다.

독일의 눈에는 이 조약, 이른바 '강요된 굴욕(diktat)'은 독일의 재기(再起)를 봉쇄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이미 새로운 전쟁의 씨앗을 품고 있었고, 1920년대 파시즘의 부상이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독일에서 파시즘의 주요 공격 대상 중 하나는 바로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이는 국민을 동원하고 독일인들의 상처와 분노를 프랑스를 향해 부추기는 수단이었다.

이처럼 한 나라를 절단하거나 분할하고 본래의 의사에 반해 강제 병합하는 것, 종교적·경제적·이념적 이유로 한 민족 전체를 노예로 만드는 것… 이러한 정치적 결정들은 피할 수 없이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강물이 흐르는 길을 막을 수는 없다. 둑을 쌓고 댐을 지을 수는 있지만, 압력이 너무 강해지면 물은 흐느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결국 가로막은 모든 것을 밀어내고 만다.

역사가 때로 되풀이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독일이 그 길을 걸었다. 당시 독일 국민의 생활 수준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여기에 1929년 경제 대공황이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 히틀러가 독일의 구원자로 자신을 내세웠고, 독일 국민들은 더 나은 삶을 바라며 그를 따랐다. 1930년대 독일은 재무장 조항을 비롯해 베르사유 조약의 여러 조항을 파기했다. 독일은 전력을 재건했지만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나라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무력한 모습만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1938년 9월 뮌헨 회담이 열렸다.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아돌프 히틀러, 에두아르 달라디에,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가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수데텐란트 위기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 사용 지역을 병합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독립 국가의 죽음에 도장을 찍은 셈이 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히틀러의 호전적 기획 앞에 버티지 못하는 평화주의에 마비되어 완전한 눈감아주기에 나섰다. 당시 유럽에 닥친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전체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본 정치인은 극소수였다. 결국 1년 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인류가 그때까지 겪어본 가장 참혹하고 극적인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다.

평화: 새로운 프랑코-저먼 일상의 시작

1945년 5월 8일 유럽에서, 그리고 같은 해 9월 2일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쟁의 대가를 계산해 보면, 유럽은 폐허가 되었고 전쟁과 빈곤에 짓밟힌 사회를 되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시 세워야 했다. 인명 피해와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우리 시대의 정신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전쟁과 함께 세계 평화의 새로운 질서가 탄생했는데, 그 상징이 국제연맹을 계승한 유엔(UN)의 설립이다. 1945년 이후 전쟁의 신 야누스 신전의 문은 닫혔다. 로마 공화국 멸망 전야에 열린 문으로 전쟁을, 닫힌 문으로 평화를 상징하던 그 신전의 문이 말이다. 그러나 냉전과 그에 따른 이념 대립은 독일을 둘로 분할시켰다. 프랑스, 미국, 영국이 서부를, 소련이 동부를 점령하면서 만들어진 분단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우정: 전쟁과 화해로 이어온 역사의 연결고리따라서 프랑스-독일 우호는 크게 프랑스와 1949년 출범한 서독(독일연방공화국, FRG)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전후 호황기라 불린 번영과 자본주의 절정기는 유럽 각국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1947년 6월 미국이 유럽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추진한 마셜 플랜이 새로운 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물론 이 계획에는 이념적 목적도 있었다. 전쟁으로 높아진 위상을 무기삼아 공산당, 곧 모스크바의 손에 서유럽이 넘어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경제 지원 계획은 서독의 재건과 도약의 원동력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독일 경제 기적'이라 불렀다.

민주적 전환 과정과 이른바 '5D 정책'을 거치며 독일은 민주화(Democratization)·비무장화(Demilitarization)·탈나치화(Denazification)·분권화(Decentralization)·탈카르텔화(Decartelization)를 이루어야 했다. 또한 독일의 정치 재건에서 기독교민주당(CDU)의 콘라트 아데나워와 독일 사회민주당(SPD)이라는 두 정당의 역할이 중요했다. 독일 사회는 정치 재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엘리트와 국민 사이의 타협을 성립시켰으며, 그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나치즘과의 결별, 즉 연방제·권력 분립·카를스루에 헌법재판소 설치 같은 새로운 민주주의 원칙 확립이었다. 둘째는 행정부의 권력 집중 방지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약점을 교훈 삼아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모든 제도적 장치는 독일을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작동했고, 그 결과 독일은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적 산물'로 재탄생했다.

프랑스의 경우 1945년 이후의 시기는 고통스럽고 극도로 복잡했다. 프랑스는 내전에 가까운 숙청의 소용돌이에 빠져 나치 독일에 협력한 자들을 응징하려 했다. 전쟁으로 유린당한 한 나라가 역사의 어두운 페이지를 넘기고자 한 일종의 속죄였다. 국가 통합을 시도한 임시 정부 이후 1946년 의회제 중심의 제4공화국이 탄생했고, 이 체제는 1958년 막을 내리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통령제 중심의 제5공화국에 자리를 내주었다.

또 다른 전쟁을 막고 복수주의(revanchisme)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화해의 노력이 필요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서독은 출범 초기부터 유럽 통합의 대열에 동참했다. 프랑스-독일 우호는 이 유럽 건설 과정과 병행하여 단단히 다져졌고, 이 연결 고리는 유럽의 심장이 되었다. 프랑코-저먼 커플은 언제나 유럽 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이 새싹 같은 우정 속에서 두 나라를 영원히 묶는 창설적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엘리제 조약이다.

1963년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는 엘리제 조약에 서명하여 프랑코-저먼 협력을 일상의 현실로 만들었다. 그 이후 수많은 도시와 학교, 지역, 대학이 자매 결연을 맺었고, 한독청소년교류협력기구(OFAJ)는 수백만 명의 청소년에게 교류의 기회를 제공했다. 1997년 바이마르 협정에 따라 1999년부터는 한독대학(UFA)이 프랑스와 독일 고등교육기관 간의 파트너십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양국 학생은 프랑스와 독일에 걸친 공동 과정을 이수할 수 있고, 연구자들은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 엘리제 조약 이후 양국의 연대는 멈추지 않고 강화되어 왔다. 가장 잘 알려진 양국 공동 사업으로는 공동 TV 채널 아르테(Arte)가 있으며, 프랑코-저먼 공동 역사 교과서 편찬 사업도 진행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오늘날 유럽 항공 산업의 선두 주체인 에어버스(Airbus) 같은 기업이 탄생했다.

프랑스-독일 우호, 유럽 통합의 견인차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혁신적인 구상이 등장했다. 라미-페르호이겐(Lamy-Verheugen) 플랜이 그것으로,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정치적 조율을 강화하고 나아가 프랑코-저먼 연방이라는 개념까지 제시했다. 이 구상에 따르면 양국 연합은 공동 군대를 보유하고 대사관을 공유하며, 양국 관료에게 상대국 언어 능력을 의무화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계획은 후속 조치를 밟지 못했지만, 프랑스와 독일을 축으로 하는 유럽과 영국 중심으로 움직이는 유럽 국가들이 공존하는 '속도가 다른 유럽(two-speed Europe)' 논의가 다시 불거진 지금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와 독일의 우정: 전쟁과 화해로 이어온 역사의 연결고리과거의 성과와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양국 정상회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프랑스-독일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관성에 젖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상대적인 진통(陳腐)의 징후도 보인다. 우주·항공·군수 산업 등 일부 경제 분야를 제외하면 프랑스와 독일의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무대로 한 동맹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럼에도 양국 관계는 국제 현안에서 자주 하나의 공동 전선을 형성하며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반대 입장에 섰는데, 미국의 개입이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거짓에 근거한 것임이 드러난 이상 그 반대는 정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커플' 안에서 국제 무대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쪽은 여전히 프랑스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지위와 거부권 덕분이다. 실제로 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며 미국의 분노를 산 나라도 프랑스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WTO 같은 국제기구에서 특히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려는 양국의 의지 덕분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이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프랑스는 2013년 말리 개입과 그보다 최근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개입에서 보듯 아프리카 문제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고, 독일은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반면 프랑스는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상대적으로 '중립적' 외교 노선을 유지해 왔다. 물론 이 노선 역시 최근 들어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프랑스-독일 우호의 마지막 단면은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드러난다. 2014년 8월 3일 일요일, 오랭주(Haut-Rhin) 지역 하르트만스빌러코프(Hartmannswillerkopf) 유적지에서 열린 기념식이 그 예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함께 참석한 이 자리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한 지 100주년이 되는 바로 그날" 두 정상은 이 바위산 정상에서 서로의 총격전으로 희생된 양국 군인 약 3만 명의 희생을 기리고,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룩된 프랑코-저먼 우호와 평화로운 유럽의 건설을 축하했다.

마무리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르덴 지방, 스당 북쪽 몇 킬로미터 지점의 작은 마을 스톤(Stonne) 고지에서 싸웠던 한 독일 참전 용사의 말을 소개한다. 며칠 만에 푸른 자연의 풍경이 포탄의 불길 속에서 진정한 지옥으로 변해버린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와 독일 참전 용사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단결과 프랑스-독일의 우정은 언제나 유럽 민족의 연합과 우리 모두가 바라는 평화가 굳건히 세워지는 청동의 반석일 것이다."(1975년 5월 25일 스톤 연설)

참고 문헌

- Corine Defrance, Ulrich Pfeil (Hg.), France, Germany and the Élysée Treaty, 1963–2013, CNRS Éditions, 2012.

- Edouard Husson, Europe against Franco-German friendship: From misunderstandings to discord, Guibert, 1998.

- Sylvain Kahn, History of the construction of Europe since 1945, PUF,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