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전설적인 바이킹 용병 형제단, 욤스비킹(Jomsvikings)의 역사와 실체

바이킹 사가가 전하는 역사와 전설의 경계선상에서, 전사들의 세계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이킹족이 약탈만 일삼으며 살았던 것은 아니며, 그런 원정은 근본적으로 상업적이고 농경적이었던 그들의 경제를 보완하는 계절적 활동에 불과했음이 밝혀졌다. 이는 중세 유럽 전역에서 기독교도와 이교도 가릴 것 없이 행해진 관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사시적 이야기들이 그렇듯, 사가들 역시 이 전쟁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주제가 바로 욤스비킹 사가(Jomsvikinga saga)다.

욤스보르그: 전설의 요새와 그 위치 논쟁

이 용어는 '바이킹(Viking)'과 고유명사 '욤스보르그(Jomsborg)'가 결합되어 탄생했다. 바이킹의 어원은 논쟁적이지만 원정, 북유럽인의 정착지, 또는 지리적 환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욤스보르그는 발트 해에 위치한 요새로, 이곳에 거주한 바이킹 용병 형제단이 욤스비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장소는 여러 라우사비수르(lausavísur, 스칼드 시)와 욤스비킹 사가, 올라프 트뤼그바손 사가(10세기 말 노르웨이 왕, 러시아에서 자라 기독교 전파를 시도함), 그리고 14세기 아이슬란드 필사본인 플라테야르복(Flateyjarbók, 플라테이 서)에도 언급된다.

색소 그라마티쿠스의 필독서 게스타 다노룸(Gesta Danorum)에서도 '율리눔(Julinum)'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덴마크 왕 하랄 블라탄(Harald Blåtand)이 정복한 뒤 스웨덴 왕자 스티르비에른 '강인한 자(Styrbjörn the Strong)'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크뉘틀링아 사가(Knýtlinga saga, 13세기 덴마크 왕조 연대기), 스티르비에른 이야기(Styrbjarnar þáttr Svíakappa), 에위르비야 사가(Eyrbyggja saga)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반면 욤스비킹 사가는 창건자를 팔나토케(Palnatoke)로 보며, 그가 벤드족(Vendo, 독일인이 북부 슬라브족, 특히 소르브족을 부르던 이름) 왕 부리스라프(Burislav, 965~1025년 재위, 폴란드의 보레스와프 1세로 비정됨)에게 땅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팔나토케와 윌리엄 텔 신화의 기원

팔나토케는 토르드 팔나손(Tord Palnason)으로 알려진 덴마크의 영웅이자 퓐(Fyn) 섬의 족장이다. 그는 덴마크 왕자 스벤(Svend)을 부추겨 아버지 하랄 블라탄에 맞서 조상신의 신앙을 지키게 했다. 물론 팔나토케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는데, 색소 그라마티쿠스에 따르면 하랄이 그에게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향해 화살을 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스위스의 윌리엄 텔 전설과 판박이로, 게르만 문화권 전설에 반복되는 전형적인 모티프다.

실체와 허구 사이: 형제단의 실존성

언제나 그렇듯 진실과 환상을 가려내기는 극히 어렵다. 모든 사료가 후대의 것인데다(호그비, 헬레스타드, 셰뤼프의 세 룬돌 제외), 욤스보르그의 실존 증거나 정확한 위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현재 포메라니아(Pomerania) 지역 어디쯤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군사적 기사단처럼 엄격한 규율로 결속된 전사 형제단의 개념은 그 자체로 매우 매력적이다.

게다가 이는 유일한 사례도 아니었다. 광란의 무아지경에서 싸웠다는 베르세르크(berserkers), 왕실 근위대를 이룬 직업 군인 후스칼(huscarls) 등도 있었다. 많은 바이킹이 빙잉에-라그(vinkinge-lag)라 불리는 집단으로 뭉쳤는데, 각자 규율이 있었고 농한기인 여름이 되면 예를(jarls)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원정대를 보강했다.

다민족 용병단: 종교와 국경을 초월한 비즈니스

욤스보르그의 정체를 놓고는 해석이 분분하다. 욤스비킹 사가는 전원이 바이킹이라지만, 스티르비에른 이야기는 동방 출신이 많았다고 전해 이질적 구성을 강조한다. 하랄 블라탄 자신이 벤드족 공주와 결혼해 그들에게 항해술을 전수했고, 덕분에 함부르크, 브란덴부르크, 홀슈타인 등지를 약탈할 수 있었다.

이런 민족적 다양성 덕분에 형제단은 이교도였고 오딘과 토르를 주신으로 모셨지만, 타 종교 신자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용병에게 최우선은 사업이었기에, 기독교 영주 밑에서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스페인에서 엘 시드(El Cid)가 사라고사 타이파 왕 알무크타디르(Al-Muqtadir) 휘하에서 싸운 경우 등 중세 유럽 전반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관행과 다르지 않았다.

엄격한 입단 시험과 규율 강령

욤스비킹 사가에 따르면 신병 선발은 엄격했다. 18세에서 50세 사이여야 했고(12세 소년 바그 오케손(Vagn Åkesson, 팔나토케의 손자)이 베테랑 시그발디 스트루트-하랄드손(Sigvaldi Strut-Haraldsson)을 꺾고 예외가 된 경우 외에는), 검증된 용기가 필요했으며, 기존 욤스비킹과의 홀름강(holmgang, 결투)을 치러야 했다. 참고로 팔나토케가 아들에게 사과를 쏘게 한 일화 자체가 입단 시험이었다는 설도 있다.

합격하면 엄격한 강령을 맹세해야 했다.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 형제간 신체적·언어적 다툼 금지(상급자가 중재)
  • 형제를 방어하고 죽음은 복수함
  • 전투에서 공포를 보이지 않음
  • 우세한 적 앞에서 홀로 후퇴하지 않음
  • 전리품은 모두 균등 분배
  • 포로가 되지 않음
  • 허가 없이 요새를 3일 이상 비우지 않음
  • 요새 내에 친족을 두지 않음(밖은 불명)
  • 규율 위반 시 추방

요새의 실체: 볼린 섬과 비네타 전설

요새 위치를 폴란드 발트 해안 볼린(Wolin) 섬의 질버베르크(Silberberg) 언덕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면적 265㎢의 이 섬에는 전설적 무역도시 비네타(Vineta)가 있었다고도 전해지는데, 기독교를 거부해 바다에 잠겼다는 전설과 달리 12세기 바이킹 습격으로 파괴됐을 가능성이 크다. 비네타 역시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일부 학자는 비네타 위에 욤스보르그가 세워졌다고 본다. 전성기 욤스보르그 항구에는 30~300척의 선박이 정박 가능했다고 하며, 최소치인 30척을 기준으로 해도 900~2,000명 규모의 전력을 갖춘 셈이다.

전성기에서 몰락까지: 퓌리스벨리르와 휜룽아보그르

욤스비킹의 활약은 10~11세기 내내 이어졌으며, 984~986년 노르웨이-스웨덴 왕위 계승 분쟁에도 개입했다. 팔나토케, 스티르비에른 '강인한 자', 스벤 1세, 시그발디 스트루트-하랄드손, 토르켈 '장신(Thorkell the Tall)' 시대가 황금기였다. 기독교 확산이 형제단을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있지만, 하랄 블라탄이 이미 965년 개종했음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정적 타격은 두 차례 대패였다. 첫 번째는 984~985년경 퓌리스벨리르 전투(Battle of Fýrisvellir)로, 스티르비에른 '강인한 자'가 삼촌 에리크 '승리자(Eric the Victorious)'에게 왕위를 빼앗으려다 패했다. 전승에 따르면 에리크가 오딘과 즉흥적 계약을 맺어 승리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1~2년 뒤 휜룽아보그르 전투(Battle of Hjörungavágr)로, 노르웨이의 하콘 시구르드손(Håkon Sigurdsson)에게 패하며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

마지막 불꽃은 1000년 스볼데르 전투(Battle of Svolder)였다. 시그발디가 이끄는 욤스비킹은 노르웨이의 올라프(Olaf of Norway)를 고립시켜 함대를 궤멸시켰는데, 이는 그의 기독교 정책 탓이라는 해석이 따랐다.

최후와 역사적 유산

생존자들은 11세기 초 잉글랜드, 노르망디 등지로 원정을 이어갔고, 크누트 '대왕(Cnut the Great)'의 친위대 팅글리드(Tinglith)의 모태가 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하지만 1043년 노르웨이 왕 마그누스 1세(Magnus I)가 욤스보르그를 공격해 도시를 약탈하고 요새를 흔적도 없이 허물며 생존자를 처형함으로써, 욤스비킹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면 그 철저한 말살 때문에 오늘날까지 실체를 둘러싼 의문이 꼬리를 무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