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아테네 민주주의를 만든 4대 정치 개혁: 드라콘에서 페리클레스까지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대중 봉기를 통해 탄생한 것과 달리, 아테네 민주주의는 폭력적인 혁명이 아니라 도시의 통합이라는 목표에 헌신한 정치인들의 개혁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네 가지 핵심 개혁과 그 주역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드라콘의 개혁: 성문법의 시작

기원전 621~620년, 드라콘은 살인 사건에만 적용되는 법률을 성문으로 기록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의 법은 그 혹독함으로 전설이 될 만큼 엄격했으며, 오늘날에도 '드라코니안(draconian)'이라는 형용사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제한적인 조치였지만, 이 개혁은 사법 분야에서 국가의 권위가 혈연 관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고, 모든 시민에게 공통의 법을 적용함으로써 귀족들의 자의적 재판 관행에 균열을 내었습니다. 이후 성문법의 수호자인 테스모테테스 6명이 아르콘(집정관) 단체에 합류하여 제도를 보강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깊어지는 와중에도 아테네의 명문 귀족 가문인 에우파트리다이의 경제적·정치적 독점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도시를 집단적으로 운영하는 아르콘은 여전히 모두 이들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6세기 그리스에서는 두 가지 모델이 등장했습니다.

  • 입법자의 중재: 합의를 바탕으로 내전으로 번질 위기가 있는 소요 사태를 종식시키는 임무를 맡은 입법자를 초빙하는 방식
  • 참주정(티라니스): 고대 그리스 초기 발전 과정에서 도시의 문제에 대한 과도기적 해법으로 자주 등장한 방식

아테네는 입법자 솔론을 거친 뒤 피시스트라토스 가문(피시스트라티다이)의 참주정을 차례로 겪으며 두 모델을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솔론의 개혁: 귀족정에서 부유정으로

솔론은 도시를 집어삼키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기원전 594~593년 아르콘을 지낸 그는 입법자이자 법전의 저자로서,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채무 노예제'를 폐지했고, 모든 시민이 도시의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또한 개인의 재산에 따라 도시에 대한 의무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솔론이 마련한 체제는 여전히 깊은 불평등을 안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귀족정에서 부유정(플루토크라시)으로의 전환에 불과했습니다. 시민들은 이제 4개의 세금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시민이 보유한 밀·포도주·기름의 양(메디므노스 단위)에 따라 다음 네 부류 중 하나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 펜타코시오메디므노이: 곡물 500메디므노스 이상 보유
  • 히페이스: 300메디므노스 이상 보유
  • 제우기타이: 200메디므노스 이상 보유
  • 테테스: 200메디므노스 미만 보유

불레(Boulè)는 권력의 자문 기구로 설립되었으나(그 실질적 중요성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실권은 여전히 아레오파고스에 남아 있었습니다. 각 부족은 매년 100명의 대표를 불레에 파견했고, 따라서 불레는 400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개인의 권리는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고위 관직은 펜타코시오메디므노이에게만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합과 연대의 정신을 강화하고자 한 솔론은 이들 유력층에게 '리투르기아'(공공 봉사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이 제도 덕분에 한편으로는 해방된 서민들이 더 이상 점차 은인으로 인식되는 엘리트에 대해 강한 증오를 품지 않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 상인, 숙련된 기업가, 상선 함대 소유주로 이루어진 신흥 부르주아지의 요구도 부분적으로 충족되었습니다. 물론 아르콘직은 여전히 대지주들에게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영토 개편과 이소노미아

기원전 508년, 아테네 최고 명문 가문인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의 에우파트리드 클레이스테네스는 국민의 지지를 얻는 대가로, 국민이 정치적 의사 결정뿐 아니라 정치 직무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개혁의 핵심은 시민 공간의 재편이었습니다. 재산과 가문 집단에 기반한 기존 정치 구조가 영토 배분 체계로 대체되었고, 아테네 시민은 이제 오직 데메(deme, 행정 구역) 소속으로만 정의되었습니다.

아티카는 세 지역으로 나뉘었습니다. 도시(아스티), 해안(패랄리아), 내륙(메소게아)입니다. 각 지역 안에는 데메 10개로 이루어진 그룹, 즉 트리튀스가 있었고, 세 지역에서 하나씩 뽑은 세 개의 트리튀스가 하나의 부족을 이루었으므로 총 10개 부족이 만들어졌습니다. 새로운 제도 조직의 기반이 된 이 체계는 전통적인 후원 정치(클라이엔텔리즘) 관행을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소노미아'(법 앞의 평등)라고 부릅니다.

데메 ⊂ 트리튀스 ⊂ 부족 ⊂ 도시라는 위계적 사회·행정 구조에, 클레이스테네스는 다음과 같은 위계적 권력 구조를 대응시켰습니다.

프리타네이 ⊂ 불레 ⊂ 에클레시아
판사 ⊂ 헬리아이아 ⊂ 에클레시아

불레는 400명에서 500명으로 확대되어(새 부족당 50명) 더 이상 아레오파고스에 자문을 제공하는 기구가 아니라 에클레시아(민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헬리아이아 법정이 창설되었음에도 아레오파고스의 사법권 장악은 여전히 지배적이었습니다.

이 개혁은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으로 투표를 채택하지 않고, 제비뽑기(불레우테스와 헬리아스트 선출)와 프리타네이의 정기 교대제를 선호했습니다. 이로써 아테네 민주주의는 부분적으로 '스토크라시'(제비뽑기에 의한 통치)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개혁: 시민 수당의 도입

기원전 5세기 중반 무렵, 페리클레스는 헬리아이아와 불레, 그리고 판아테나이아 축제 관람에 대해 일일 참석 수당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스토스'(misthos, 급료)로, 가난하고 도시에서 멀리 사는 시민들까지 정치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수당 덕분에 그들은 하루 일거리를 포기하면서도 시민적·정치적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미스토스의 액수는 클레온 시대에 하루 2옵볼에서 3옵볼로 인상되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의 낮은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 조치는 아테네 정치 체제의 민주적 성격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다만 페리클레스는 정치 제도의 개혁보다는 군사적·외교적 활동과 그가 추진한 대형 건축 사업들로 더욱 두각을 나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