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11후사르연대: 창설부터 1814년 해체까지의 역사

창설과 초기 전역 (1793~1799)

1793년 7월 28일 국민공회 법령에 따라 창설된 제11후사르연대는 방데 전쟁에 참전한 뒤, 1793년 라인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1794년 비다소아 강, 1796~1797년 독일, 1799~1800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다.

재편성과 네덜란드 후사르의 통합 (1803~1810)

1803년(공화력 12년) 군제 개편으로 연대는 제29용기병연대로 개편되었다. 제11후사르라는 명칭은 1810년 8월 18일 칙령에 따라 네덜란드 후사르연대와 통합되어 재창설될 때까지 사라진다. 이 네덜란드 기병들은 대전쟁(대육군)의 베테랑으로, 그들의 용맹에 대한 보상으로 제11후사르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후사르의 전력 (1797~1809)

1797년 홀란트에서 집결한 이들은 1799년 영국군과 교전했고, 1800~1801년에는 오주로 장군 휘하에서 독일 전선에서 복무했다.

1805년 마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대육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제6후사르연대, 제8샤쇠르연대와 함께 라코스트 사단을 구성했다. 전역 전반에 참여해 알트마르크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1806~1807년에는 모르티에 원수의 제8군단에서 복무하며 콜베르크 앞에서 에센 남작의 스웨덴군과 싸웠다.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대치 중일 때, 프로이센의 쉴 소령이 이끄는 봉기 진압전에 그라티앙 장군 휘하로 투입되었다. 5월 25일 슈트랄준트를 점령한 쉴은 방어를 준비했으나, 5월 31일 네덜란드 후사르의 돌격 중 한 기병이 사브르로 쉴을 사살하며 봉기는 진압되었다. 한편 4개 중대는 스페인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스페인 전선 (1808~1810)

두랑고 전투와 초기 작전

1808년 10월 25일 스페인에 진입한 네덜란드 후사르 중대들은 르페브르 원수의 제4군단에 배속되었고, 10월 31일 블레이크 장군군을 상대로 한 공세에 참여해 두랑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다만 공격이 시기상조였다는 평가로 라 로마나 부대가 포위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토로 지역 등에서 다수의 작전에 투입되었고, 반 호우세 중령이 중상을 입기도 했다.

메데인, 알모나시드, 탈라베라, 오카냐

1809년 비クト르 원수가 쿠에스타 군을 메데인에서 격파(3월 28일)하는 동안, 세바스티아니 장군의 제4군단은 카르토아할 군과 맞섰다. 네덜란드 후사르는 밀로 장군의 용기병 사단(제5, 12, 16, 20, 21용기병연대)과 함께 행동했다.

2월 11일 알부케르케 공작의 저지선을 돌파했고, 26일 과디아나 강 다리 전투에서 네덜란드 후사르는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반 로에스크 반 알케마데 대령이 부상당했으나 연대 나팔수 힘머만이 구출했다. 발데페냐스로 후퇴한 뒤 소규모 작전을 이어가던 중, 웰즐리(후의 웰링턴) 휘하 영포연합군의 공세로 전황이 바뀌었다.

7월 27일 탈라베라 전투에서 베네가스 군을 상대로 분전했고, 8월 1일 알모나시드 전투에서 세바스티아니가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11월 19일 오카냐 전투에서 아레이사가 지휘하는 스페인 신편 군대마저 격파된 것이 네덜란드 후사르의 스페인 전선 마지막 전투였다. 1810년 초 마드리드에서 제26샤쇠르연대와 함께 있다가, 한 개 중대는 제1후사르연대에, 나머지는 부아르뒤크(Bois-le-Duc) 창고로 이동해 1810년 8월 18일 칙령에 따라 제11후사르연대를 재편성했다.

제11후사르연대 제2기: 러시아 원정과 최후 (1810~1814)

재편성과 1812년 원정 준비

제라르 드 콜라르트 대령 휘하 아라스에서 재편성된 연대는 1812년 1월 네 원수의 군단에 편입되어 4월 제3군단이 되었다. 제6경기병연대와 함께 무리에즈 장군의 제7경여단을, 뷔르템베르크 제4사냥기병연대와 함께 편성되었다. 제3군단에는 브뉘망 장군의 제14경여단(제4, 28사냥기병, 뷔르템베르크 제1, 2사냥기병)도 포함되었다.

니만 강 도하와 스몰렌스크까지

6월 24일 니만 강을 도하한 연대는 뮈라 원수의 선봉에 합류해 러시아군이 전투를 거부하는 가운데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8월 13일 찰로보와 호르니노에서 좌익을 엄호했고, 14일 크라스노이 전초전에서 네미로프스키 사단과 샤르코프 용기병이 엄호하는 10문 포대를 상대로 네 원수가 직접 돌격을 지휘했으나 러시아군은 질서 있게 후퇴했다. 연대는 돌격과 추격전을 벌였다.

8월 17일 스몰렌스크에서 카탄 방면 좌익을 엄호했고, 모스크바 진군 내내 선봉에 섰다. 보로디노 전투(모스코바 전투) 당일 참혹한 돌격전에서 무리에즈 장군이 중상을 입었고, 연대는 다시 돌격해 길을 열었다. 브뉘망 장군이 여단장을 맡아 제3군단과 모스크바에서 합류했으나, 연대 병력은 140명으로 줄어들었다.

대퇴각: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베레지나까지

퇴각 중 축소된 연대는 후위부대의 서사시를 썼다. 추위와 적, 네 원수와 함께 싸우며 군사적 용기의 가장 빛나는 페이지 중 하나를 남겼다. 말로야로슬라베츠, 모자이스크, 비아즈마, 크라스노이를 거쳐 러시아군 사이로 불가능한 길을 열며 베레지나 강을 건너 마침내 니만 강을 재도하했다. 생존자는 79명, 160명이 후송되었고, 나머지는 '그곳'에 남았다.

1813년 전역과 해체

1813년 콜라르트 대령이 모스크바에서 전역(퇴역)하고, 아라스에서 리에가르 남작이 신임 대령으로 부임했다. 페펜드레흐트 대위가 유효 병력 1개 중대를 이끌어 세바스티아니의 제2기병군단, 엑셀만스 장군의 소사단(제4, 7, 20, 23, 24사냥기병연대와 제11후사르연대, 약 750기병)에 배속되었다.

5월 26일 스프로타우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카츠바흐 전투에서 고전했고, 10월 16일과 18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돌격했다. 하나우 전투에서 다시 한번 영광스럽게 돌격한 것을 끝으로, 연대는 1814년 초 해체되었고 1873년까지 재창설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