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 라트르 장군이 정의한 '보주 전투'
제1프랑스군 사령관 장 드 라트르(Jean de Lattre de Tassigny) 장군은 저서 『라인과 다뉴브』에서 보주(Vosges) 전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툴롱과 마르세유의 대대들이 내뿜던 격노 속에서 빠른 기세로 출발한 해방 전역은, 론 강과 손 강을 따라 미군 동료들과 벌인 일종의 '종탑 경주'에 이어, 보급선이 길어지고 초기 계획보다 앞질러 전진하면서 점차 속도를 잃었다. 이제 휘발유와 탄약이 바닥난 우리는, 설령 숨이 찬 것은 아니더라도 독일군이 벨포르 앞에 신속히 구축한 저항선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새로운 국면이 열렸으니, 그것이 바로 보주 전투였다."
"고되고 실망스러운 국면이었다. 끊임없는 전투의 쓰라림 속에서 온갖 어려움이 거듭 불어나고, 특히 적대적이었던 보주의 가을, 그 혹독함까지 더해졌다… 이 전투는 알자스로 들어서고자 하는 조급함과, 벨포르라는 관문을 여는 데 필요한 병력과 물자가 모이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진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보주 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는 패치(Patch) 미군의 움직임에 발목이 잡혀, 우리 부대의 용기가 마침내 적의 극악한 완강함을 꺾은 듯할 때마다 전력은 분산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불운의 전투였다."
"그러나 결국 이 전투는 거대한 양동(陽動)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뒤에서 승리의 벨포르 공세가 준비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운명을 강제로 뒤집은 전투였다."
벨포르 회랑을 향한 배치
9월 15일부터 20일 사이, 드 몽사베르(de Monsabert) 장군의 프랑스군 제2군단이 벨포르 회랑(Belfort Gap) 정면에 자리를 잡았다. 이는 두브 강과 스위스 국경 사이에 전개하여 연속된 저항선에 의해 저지된 상태였던 베투아르(Béthouart) 장군의 제1군단 바로 좌측이었다. 드 라트르 장군의 최초 구상은 요새화된 벨포르 자체를 은평하면서 양익에서 기동함으로써 오트알자스(Haute-Alsace)로 통하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만일 이 기동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제1군단은 두브 강과 스위스 국경 사이의 통로를 따라 퐁드루아(Pont-de-Roide)–델(Delle)–알트키르히(Altkirch) 방면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제2군단은 지로마니(Giromagny), 발롱달자스(Ballon d'Alsace), 뷔상 고개(Col de Bussang) 방면으로 진격하여, 최소 목표인 루주몽(Rougemont) 고원을 확보하거나, 도올러(Doller) 강과 투르(Thur) 강 상류 골짜기에 도달해 세네(Cernay)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세네를 손에 넣으면 물라우즈(Mulhouse)로 통하는 길과 콜마르(Colmar)로 통하는 길이 동시에 열린다.
360km 전선과 수송 위기
제1프랑스군은 알프스 방면에서는 바르셀로네트(Barcelonnette)부터 레만호까지, 벨포르 정면에서는 로몽(Lomont)부터 세르방스(Servance)까지 360km가 넘는 전선에 걸쳐 있었다. 이 가운데 실제 공세를 감행해야 할 구간은 75km에 불과했지만, 수송 위기의 후유증은 뼈아프게 느껴졌다. 파괴된 교통망 탓에 프로방스 보급기지와의 연결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군 창고에는 탄약과 휘발유 한 대분(一臺分)조차 아직 비축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강력한 공세에 필요한 필수 물자가 충분히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공세 개시의 전제 조건이었다.
'불운의 나선'이 시작되다
그러나 이 불가피한 대기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수송 상황이 허용하는 속도로 작전이 준비되는 동안, 인접한 패치(Patch) 미국 제7군이 보주 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프랑스 제1군은 9월 25일부터 제2군단을 좌익 전체에 투입하고 가용한 모든 수단으로 이를 점진적으로 증강해야만 했다. 바로 이 메커니즘을 통해 보주 전투의 나선이 시작되었고, 벨포르 회랑에 대한 강력한 공세 작전이 유예되는 동안 그 나선은 계속해서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