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여성의 부상, 출생의 위기, 그리고 전쟁 기념비

전쟁이 가져온 변화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 사회 전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남성들이 최전선으로 떠난 자리를 메우고, 출생률의 급감과 인구 회복의 어려움, 그리고 마을마다 세워진 위령비까지—전쟁 이후의 프랑스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탄약 제조 여성들, '뮈니시오네트'

프랑스는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남성들이 모두 최전선으로 떠난 상태에서 1914년이 끝나기 무섭게 탄약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남편들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직접 했을 일을 여성들이 대신 수행하도록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여성들의 남편을 죽일 물자를 만드는 일에 나선 이 여성들은 '뮈니시오네트(munitionettes)'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렸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이 동원된 곳은 탄약 공장만이 아니었습니다. 남성들이 종사하던 각종 직업 분야에서 수많은 대체 인력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맡은 것 역시 여성들이었습니다. 농업, 산업, 상업 등 어떤 분야에서든 여성들은 주부로서의 삶을 벗어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겉으로는 소홀히 여겨지는 듯했지만, 이러한 경험은 여성들이 남성만큼 유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참정권을 요구해 왔듯이, 이러한 흐름은 점차 여성들을 평등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1916년, '취소된' 출생

남성들이 최전선에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했으며, 여성들 역시 아이를 낳지 않으면서 1916년은 출생아 수가 가장 적은 해로 기록되었습니다. 정부는 인구를 다시 늘리기 위해 여성들에게 출산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여성들은 스무 살에 죽어갈 병사를 만들기를 거부하고, 포탄의 밥감이 되기를 거부하며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은 비애국자로 취급받았고, 그들의 거부는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험까지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낙태 시술을 해주던 조산사들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출생률 감소에 더해, 젊은 남성들이 모두 최전선으로 떠나면서 이미 '과부'가 되어버린 많은 젊은 여성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결혼하지도 못한 남편을 위해 애도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흰 과부(white widows)'라고 불렸습니다. 전쟁 기념비에 가장 많이 새겨진 이름은 스무 살 남짓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프랑스 인구가 1914년 8월 1일의 수준을 회복하기까지는 무려 1950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전쟁 기념비가 남긴 것

프랑스의 모든 코뮌(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국의 영웅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알제리 전쟁 등 다른 전쟁의 전사자 이름들도 함께 새겨져 있지만, 무엇보다 주를 이루는 것은 가장 많은 남성들을 동원해 베르됭의 죽음으로 내몬 제1차 세계대전의 이름들입니다.

특히 농촌 지역의 위령비에는 가장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기념비들이 프랑스인들에게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의혹도 제기됩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모든 가정에서 한 명 이상의 가족 구성원이 사라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원인이 전쟁이라면 그 책임은 독일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매일 일깨워주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쟁 기념비는 프랑스인들이 독일에 품고 있던 증오를 자극하며 그들의 감정에 깊이 작용했고, 이것이 또 다른 세계 대전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