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유럽의 역사

  • 중세의 '마리 끌레르': 1457년 탄생한 세계 최초의 여성 잡지

    여성 잡지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마리 끌레르(Marie Claire)를 비롯한 현대 여성 잡지들이 사회 속 여성의 위상을 인정받게 만든 계기라고 생각하신다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실제로 여성을 위한 잡지, 혹은 출판물의 역사는 1457년, 즉 여성이 아직 남성에 종속되어 있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나폴리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된 필사본이 흥미로운 문서는 캐나다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Wilfrid Laurier University)의 제임스 웰던(James Weldon) 교수가 나폴리 도서관에서 연구를 진행

  • 왕위에 오르면 목숨이 위태? 고트족의 '왕살해 열풍'

    두 제국 사이, 3세기의 지배고트족은 로마와 이슬람이라는 두 거대 제국의 경계에 걸쳐 이베리아 반도를 3세기 동안(414~711년) 통치했다. 흔히 생각하던 것과 달리, 이들은 앞선 민족이나 뒤를 이은 민족과 비교하면 특별히 잔혹하거나 폭력적인 민족은 아니었다. 다만 단 하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바로 왕살해(시해)에 대한 열정이다.이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었다. 고트 왕국은 세습군주제가 아닌 선출군주제였기 때문이다. 여러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은 극도로 치열했고, 그 결과는 대개 왕의 죽음으로, 운이 좋은 경우에는 톤승(머리

  • 황제의 의심에 스스로 거세로 답하다 — 중국 환관의 수호성인 '강평' 장군의 충격적 실화

    역사에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치세에 벌어진, 한 장군이 스스로 몸을 훼손해가며 무죄를 입증한 실화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왜 그가 환관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실 것입니다.영락제는 1402년부터 1424년까지 중국을 통치한 황제였습니다. 그는 다소 편집증적인 성향에 성급하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어느 시기, 영락제는 심복인 강평 장군에게 국정과 가장 소중한 재산인 후궁(하

  • 오마르 칼리프의 '파괴적 논리':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소각 일화와 역사가 남긴 경고

    역사에는 결코 기록되지 않으리라 여겨졌던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실제로 연대기에 남아, 후대에 강렬한 경고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칼리프 오마르가 방대한 도서관의 소각을 정당화한 일화가 바로 그것입니다.정통 칼리프 시대와 두 번째 칼리프 오마르무함마드가 사망한 뒤 이슬람 역사에서 이른바 정통(正統) 칼리프 시대가 열립니다. 선지자의 친족이거나 가까운 동료였던 이들은 최초의 네 명의 칼리프로 꼽히는데, 순서대로 아부바크르, 오마르, 우트만, 알리입니다.두 번째 칼리프였던 오마르는 군사적·행정적 확장을 이끌며 시리아

  • 기독교인을 죽이는 약? 1321년 프랑스 우물 독살 음모와 유대인 박해의 진실

    유대 민족은 수세기에 걸쳐 박해, 학살, 불의의 희생을 겪어온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가장 가깝고 방대한 생존자 증언이 남아 있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이지만, 그보다 이른 시기에 벌어진 덜 알려진 박해들 또한 결코 이에 못지않게 잔혹했습니다.역사 속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혐의,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혐의, 의식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 등 온갖 모함으로 고발당해 왔습니다.여기서는 14세기 프랑스, 특히 1321년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해 프랑스에

  • 죽음의 건배: 잔을 부딪히는 풍습의 숨겨진 기원, 중세 독살 문화에서 온 이유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외치는 풍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한 적 있으신가요?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지만, 그 극적인 배경 때문에 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이를 죽음의 건배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중세 시대의 축제와 연회는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정적을 한자리에 모아 제거할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가장 은밀하면서도 위험 부담이 적은 수단이 바로 독살이었습니다.그래서 호스트는 손님에게 자신의 잔에 포도주나 맥주 같은 음료를 조금 따라주곤 했습니다. 이는 내

  • 포위 공격의 결과: 몽세구르 함락 이후 실제로 벌어진 일들

    중세 시대 포위 공격(siege)은 마을이나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된 군사 전술이었습니다. 공격군은 성벽을 둘러싼 뒤 물과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혹은 포위된 자들이 더 이상 탈출로를 찾지 못하고 항복할 때까지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포위 공격의 역사는 요새가 함락되는 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포위된 자와 포위한 자 양측 모두에게 뒤따르는 결과들이 있었고, 이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HdH와 호세 훌리오(José Julio)의 도움을 받아, 몽세구르(Montségu

  • '왕 만세!' 한마디로 임박한 왕실의 뿔을 피한 남편의 기지 — 프랑수아 1세 일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1494~1547)는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인 군주였지만, 정치와 외교 무대에서는 파란만장한 행보를 걸었습니다(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의 대립과 동맹). 사생활 역시 사치와 방탈로 점철되었는데, 실제로 그의 삶은 빅토르 위고의 희곡 『왕은 즐겁다』에 영감을 주었고, 이 작품은 다시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탄생의 모태가 되었습니다.어느 날 왕은 파리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감 수준이었지만 점차 마음이 깊어졌고, 왕은 직접 만나기

  • 샤를마뉴의 힘, 검 '두란다르테'로 상징된 카롤루스 대제의 권위

    대왕 카롤루스 1세, 흔히 샤를마뉴(Charles the Great, Carolus Magnus)로 알려진 그는 768년부터 서거할 때까지 프랑크족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분열되어 있던 여러 프랑크 왕국을 하나로 통합하여 서유럽과 중부 유럽 대부분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이탈리아를 정복한 뒤에는 800년 12월 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며, 유럽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강대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그의 권력은 무엇보다 검 두란다르테(Durandal)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 바이외 태피스트리: 70미터 천에 짜인 '중세 만화', 헤이스팅스 전투의 생생한 기록

    헤이스팅스 전투는 잉글랜드의 왕좌를 정복자 윌리엄에게 넘겨준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노르만 공작 윌리엄은 수개월에 걸쳐 잉글랜드 침공을 치밀하게 준비했으며, 1066년 9월 27일에서 28일 사이 영국 해협을 건너 현재의 헤이스팅스에서 약 6마일 떨어진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이후 10월 14일, 앵글로색슨 군대와의 운명적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정복자 윌리엄의 군대는 최전선에 궁수를 배치하고 그 뒤에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은 반면, 해롤드 왕이 이끄는 앵글로색슨군은 방패로 몸을 지키는 일종의 방패벽 진형을 이루며 맞섰습니다. 전투는

  • 전쟁 중에도 하렘을 데리고 다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사치스러운 원정 생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는 전사(戰士)로서 불멸의 영광을 누린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원정이 부하 병사들이 겪은 고초만큼 가혹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오히려 황제는 전장에서는 물론, 전투와 전투 사이의 휴식기에도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만끽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군대와 함께 방대한 도서관의 상당 부분, 각종 짐승을 사육한 일종의 동물원, 나아가 황제와 군 내 저명 인사들의 유희를 책임지던 여인들로 구성된 하렘까지 원정 행렬에 동행시켰습니다.그의 적들은,

  • 노르만 여왕이 안달루시아 미남 시인에게 반했을 때: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9세기 원조 이야기

    1970년대에는 코스타 델 솔을 찾은 스웨덴 관광객 여성들이 이베리아 라틴 연인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노르만인과 이베리아인 사이의 이러한 감정적 교류는 무려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844년, 알-안달루스를 통치하던 에미르 압드 알-라만 2세 시대에 바이킹들은 과달키비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세비야를 약탈했습니다. 강력한 안달루시아 군대를 소집한 에미르는 타블라다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습니다. 조건을 분명히 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맺기 위해 에미르는 바이킹 궁정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그 수장은 궁정

  • 피렌체 vs 베네치아, 15세기 인본주의자들의 엉뚱한 논쟁 — 포조 브라치올리니의 결정적 한마디

    15세기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인본주의자들이 모인 회의에서는 예술, 문학, 철학, 신학 등 지성의 다양한 주제가 활발히 오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남성 모임에서나 그렇듯, 회의 끝에는 결국 더 일상적인 화제로 흘러가기 마련이었습니다. 물론 축구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만 빼고요. 회의에서 여성들도 잠시 언급되긴 했지만, 이날 진짜 핵심 주제는 다름 아닌 남성적 특성의 차원이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에게 규모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피렌체인과 베네치아인은 저마다 자신들의 특성을 자랑하며 각종 이론을 폈지만, 어느

  • 역사 속 한 장면: '현명왕' 알폰스 X, 하나님 앞에 내뱉은 충격적인 한마디

    알폰스 X, 일명 «현명왕(El Sabio)»이라 불린 그는 1252년부터 1284년까지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재정복(레콩키스타) 사업 외에도 그는 문화와 예술의 탁월한 후원자였으며, 문학 작품인 『칸티가스(Cantigas)』와 법전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를 직접 집필·편찬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천문학에 깊은 열정을 지녔던 그는 당대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아랍 천문학자들에게 행성 운동표 작성을 명하기도 했습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나와 상의하셨다면, 더 좋은 세상을

  • 처형대 앞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토머스 모어의 마지막 순간

    극한의 상황에서 침착함을 잃는 사람이 대다수지만, 최악의 순간에도 평정심은 물론 유머 감각까지 유지하는 사람은 드물게 존재합니다. 그 정점에 선 인물이 바로 영국의 작가이자 정치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입니다.토머스 모어는 1477년 런던에서 태어나, 1516년 『유토피아(Utopia)』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정의롭고 선하신 한 분의 신을 따르는 세상을 묘사했는데, 오늘날 유토피아라는 용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1518년부터는 헨리 8세를 섬기며 총리(대법관)직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헨리

  • 손과 발이 곧 계산기? '20'을 '사람 한 명'으로 세던 원주민의 독특한 계수법

    숫자를 세는 방식은 문화권마다 제각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 둘, 셋조차 오랜 세월 쌓인 약속일 뿐,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창의적인 수 세기 방식들이 존재합니다. 오늘 소개할 것은 베네수엘라 오리노코 강 유역 원주민들의 언어 타마니(tamaníes)의 계수법입니다. 이들은 손과 발을 하나의 살아있는 계산기처럼 활용했는데, 그 체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4 : 해당 용어의 출처와 번역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5 : 손(한 손)으로 번역됩니다. 6 : 다른 손의 하나 7 : 다른 손에서 둘 10 : 양손

  • 시어머니보다 더 나쁜 '할머니 시어머니' 고스윈다 — 서고트 왕국을 뒤흔든 종교 박해의 역사

    시어머니로 인한 고생은 이미 여러 이야기로 익숙하지만, 오늘 소개할 인물은 그 어느 시어머니보다 극단적입니다. 며느리이자 친손녀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은 여인, 고스윈다(Goswinda)의 이야기입니다.이야기의 배경은 서고트 왕국의 중심지 톨레도, 곧 고트족의 왕 레오비길도(Leovigildo)의 궁전입니다. 그는 마지막 아리우스파 왕으로, 왕국 통일(레반트 지역에서 비잔틴 세력을 몰아내고 갈리시아에서 수에비족을 축출)과 법제 정비(유리코 법전을 개정한 Codex Revisus 반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 산적이 된 마지막 오메야: 아벤 후메야와 알푸하라스 전쟁, 그리고 모리스코 추방의 역사

    1502년 개종령 이후 이베리아반도에 남은 무슬림들에게는 두 가지 길만 주어졌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해 모리스코(Morisco)가 되거나, 아니면 고향을 떠나는 것.태어난 땅도, 집도, 재산도, 가족도 모두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체 왜 떠나야 했을까요? 결국 다수는 개종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몰래 자신들의 관습과 의식을 계속 지켜 나갔습니다. 교회 입장에서는 일단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고, 상황도 진정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구(舊) 기독교인들은 모리스코들을 끝내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 스페인 최초이자 유일한 '스페인의 주교'? 721년 로마 공의회에 남겨진 역사적 수수께끼

    스페인의 탄생, 즉 영토적·정치적 통합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나라의 뿌리를 로마 속주 히스파니아에서 찾고, 또 어떤 이들은 종교적 통합을 이룬 서고트족, 혹은 가톨릭 군주들에서 그 기원을 보기도 합니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이토록 다양한 만큼, 여기서는 작은 역사적 수수께끼 하나를 소개하고 그 의미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려 합니다.서고트 왕국의 세계는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무슬림 군대 앞에 크게 무너졌습니다. 불과 20년 만에 그 확장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 이름 한마디가 왕비의 운명을 바꿨다 — 카스티야 공주 '우라카'와 '블랑카'의 실화

    중세 유럽에서 왕비를 뽑는 기준은 오늘날과 사뭇 달랐습니다. 대개 정치적·경제적 동맹이 최우선 과제였고, 개인의 자질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의 미래 왕비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는 의외의 기준이 사용되었는데, 바로 이름이었습니다.펠리페 2세 아우구스투스(프랑스 국왕), 장 1세(잉글랜드 국왕), 그리고 알폰소 8세(카스티야 국왕)는 삼자 협정을 체결하며, 훗날 프랑스 왕이 될 루이 8세를 알폰소 8세의 미혼한 두 딸 중 한 명과 혼인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잉글랜드 왕은 두 공주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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