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아시아의 역사

  • 약 7만 년의 기후 변화가 그린 조몬 시대의 흥망성쇠

    약 7만 년 전, 따뜻했던 지구의 기후는 전 세계적으로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시작된 뷔름 빙하기는 약 1만 년 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빙하기의 끝자락, 한랭 회귀의 시대 빙하는 오랜 기간 지속되지만, 약 2만 년 전부터 서서히 따뜻해지는 조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2만~1만 5천 년 전 무렵 한랭 회귀 현상으로 인해 매우 추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일본 주변의 평균 기온은 시베리아에 필적할 정도로 영하 7도까지 내려갔으며, 본격적인 온난화가 체감된 것은 1만 5천 년 이후였습니다. 얼음의 융

  • 공백의 4세기, 고대 일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2018년 11월 27일, 일본 나라현(奈良県)의 이치오미야츠카 고분 주변 유적에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축물 대벽(大壁) 건물이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도래인(渡來人), 즉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축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걸친 시기라 하면, 일본사에서 이른바 공백의 4세기로 불리는 시대입니다. 당초에는 야마토 왕권 5왕 중 한 명인 유랴쿠 천황(5세기 후반 재위) 대 이후에 도래인들이 정착한 것으로 보았지만, 이번 발견으로 정착 시기가 한참 앞

  • 야요이 문화의 시작은 생각보다 500년 더 빨랐다!? 일본 고대사가 다시 쓰이는 이유

    야요이 시대는 대륙과 한반도에서 논 벼농사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해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간주됩니다.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규슈 북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시점은 기원전 5세기경으로 추정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습니다.실제로 규슈 북부에서 출토된 야요이 시대 초기 토기를 탄소14 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 기원전 900~800년경으로 집중되는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면 일본 열도의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시기는 기

  • 혼노지의 변의 미스터리, 아케치 미츠히데는 진범이 아니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배신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은 하극상이 드물지 않던 전국시대에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신 행위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지금까지도 다양한 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역사는 당대 권력자들의 시각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겨진 문헌이 모두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혼노지의 변 당일 아케치 미츠히데가 과연 현장에 있었는지, 그리고 진짜 범인은 누구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아케치 미츠히데의

  • 혼노지의 변, 오다 노부나가의 시신은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

    일본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혼노지의 변에서는 명장 아케치 미쓰히데의 동기와 배후 세력뿐만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이에 관해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흥미로운 점은 반역의 당사자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물론,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한 하시바 히데요시조차 노부나가의 시신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오다 노부나가의 시신을 찾았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하다아케치 미쓰히데는 새벽 6시경 혼노지를 포위하는 기습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 장쭤린 폭살 사건(황고둔 사건)이란? 일본 관동군의 폭탄 테러 배경과 결과

    시대적 배경이 앞선 글과는 다소 다르지만, 이번 글에서는 중국 군벌 펑톈파의 영수 장쭤린이 1928년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살된 사건, 이른바 장쭤린 폭살 사건(황고둔 사건)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이 사건에 일본이 개입한 것 아니냐?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설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관동군이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통설대로 관동군이 범인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장쭤린 폭살 사건 이전의 시대 상황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관동군이 관동주총독부에서 분리되

  • 모리 모토나리의 '세 개의 화살'은 신화였다?!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하면 세 개의 화살 일화가 가장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일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다만 창작이라고 해도, 이런 전설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모리 모토나리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흥미로운 점은, 이 일화가 완전한 허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바탕이 된 문서가 실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모리 모토나리가 남긴 삼자 교훈장전국시대 아키 국(安藝國)의 영주였던 모리 씨는 주고쿠 지방과 규슈 일부를 지배하는 석고 170

  • 고케닌(御家人)이란 무엇인가? 가마쿠라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제도의 모든 것

    무로마치 시대가 시작되기 전, 고다이고 천황은 어떻게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을까요? 원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의 관점에서 글을 쓰려 했지만, 막부의 근간을 이루는 고케닌 제도에 대해 제대로 다룬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가마쿠라 시대를 지탱한 핵심 제도인 고케닌을 정리해 보겠습니다.쇼군과 고케닌 사이에 은혜와 봉사로 연결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고케닌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마쿠라 시대에 처음 등장한 호칭이라는 점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설계한 에도의 도시 계획, 세계적 대도시 탄생의 비결

    1590년 오다와라에서 호조씨(北条氏)가 멸망하자, 당시 간파쿠(관백)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간토 지방으로의 전봉을 명했습니다.당시 에도 주변은 오타 도칸이 축성한 에도 성이 있었지만, 광대한 습지가 펼쳐져 있었고 인구는 오다와라보다 적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이에야스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땅이 아니었던 셈입니다.게다가 간토 지방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중심지였던 가마쿠라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 가신들은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한 도시 개발을 진지하게 추진할 것을 진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오다

  • 소빙기 에도시대 사람들의 겨울나기, 어떻게 추위를 이겨냈을까?

    최근 들어 전국시대의 시작과 관련해 새로운 학설이 하나둘 제기되고 있습니다.전 세계적으로 14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소빙기(Little Ice Age)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15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기온이 유독 낮았는데, 평균 기온 차이가 2~3℃ 정도로 작아 보여도 농작물 생육에는 생사를 가르는 치명적인 변수였습니다.그래서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와 에도시대를 거치며 흉작에 따른 기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요즘도 흉년은 있지만 수입 쌀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식량 부족이 곧바로 목숨 문제로

  •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초상화가 어느새 바뀌었다!?

    역사 시간을 거쳐온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본 적 있을 그 초상화입니다. 검은 말에 올라탄 무사의 모습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말 위의 인물은 무사다운 기개가 넘치지만, 쇼군이라는 위치 덕분에 강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고노 모로나오였다!?이 초상화가 다카우지라는 학설은 1919년 역사학자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가 논문에서 소개하면서 정설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1968년 고문서학자 하기노 산시치히코(萩野三七彦)가

  • 오케하자마 전투는 기습이 아니었다? 새로운 학설의 등장

    오다 노부나가는 어떻게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할 수 있었을까요? 앞서 이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그 글에서는 소수의 오다 군이 오케하자마에 진을 치고 쉬고 있던 이마가와 군을 산 뒤편에서 기습하여 승리했다고 서술했습니다.두 사료에 담긴 오케하자마 전투의 상반된 해석오케하자마 전투를 연구하는 데 핵심이 되는 사료는 『신초코키(信長公記)』와 『보안본 노부나가기』입니다.보안본 노부나가기는 에도 시대에 간행된 것으로, 『신초코키』를 바탕으로 저자 자신의 독자적인 고찰과 해석을 덧붙인 책입니다. 노부나가의 공식 기록에 근거하고 있기

  • 사무라이도 아닌 센노 리큐,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에게 세푸쿠를 명했을까?

    센노 리큐, 와비차를 완성한 다성센노 리큐(千利休)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에 활동한 다인(茶人)입니다.그는 와비차(侘び茶)를 완성한 인물로 다성(茶聖)이라 불렸으며, 당대 최고의 다인으로 손꼽히던 쓰다 소규(津田宗及), 이마이 소큐(今井宗久)와 함께 삼대 다인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도요토미 정권에서 센노 리큐의 지위1591년 2월 28일, 센노 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세푸쿠(切腹)로 생을 마감했습니다.사무라이도 아닌 다인에게 어째서 세푸쿠라는 형벌이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

  • 대공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며 전쟁이 끝난 지 어언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전후 재건의 기반이 된 일본국 헌법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위대의 지위 규정, 미일 동맹의 안보 문제 등 일본의 전후 체제에 관한 논의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전후 세대 중 하나입니다. 직접적인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 제2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총력전 체제와 국민 통제

    앞선 글 대공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에서는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이번 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치닫게 된 과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총력전 체제로의 전환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연합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했습니다. 미국 등 연합국과 맞서 싸우는 일본의 상황은 총력전이라 불릴 만큼 국가 전체가 전쟁에 매달린 상태였습니다.태평양전쟁 이전인 1938년, 정부는 이미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두었습니다. 이 법은 국가

  • 원자폭탄 투하와 태평양 전쟁의 종식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 시작1942년 4월 18일, 미군이 감행한 최초의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16대의 B-25 폭격기가 도쿄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이 그 시초입니다. 이후 한동안 공습은 중단되었지만, 미국이 B-29 폭격기 양산에 성공하면서 1944년 11월부터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었습니다.미군의 움직임미국은 일본이 점령했던 사이판·티니안·괌을 탈환한 뒤

  • 혼노지의 변을 알고도 히데요시를 추격하지 않은 모리 씨, 그 숨겨진 이유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모리 씨가 지배하던 주고쿠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 있었습니다. 전투가 한창이던 중, 비젠 다카마쓰 성에서 시미즈 무네하루가 지키는 성을 수공(水攻)으로 공략하는 다카마쓰 성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582년(덴쇼 10년), 바로 그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납니다.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동료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 씨와 강화를 맺고, 다카마쓰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확인한 뒤, 미쓰히데에 대한 복수를 위해 히메지로 군을

  • 전국시대 3대 무능 다이묘, 호소카와 마사모토·오우치 요시타카·이마가와 우지자네

      영웅과 어리석은 자가 공존한 전국시대 응인의 난(1467년)을 기점으로 약 150년간 이어진 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전국 다이묘가 난립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인물들은 뛰어난 능력으로 위업을 쌓았고, 그 이름은 후세에 길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영웅이 있는 만큼, 그림자처럼 어리석음으로 평가받는 인물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3대 무능 다이묘로 불리는 세 인물을 소개합니다. 손에 넣은 권력을 스스로 흩어버린 호소카와 마사모토 호소카와 마사모토

  • 아무도 몰랐던 조몬인의 연애, 1만 년 전 선사시대의 사랑 이야기

    여러분, 지금 사랑하고 계신가요?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시대와 문화에 따라 가치관과 연애 방식은 크게 달라집니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 사회에서는 가문의 서열이 연애의 중요한 기준이었고, 전국시대에는 다이묘 가문들 사이에 정략결혼이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또한 뛰어난 자손으로 집안을 이어가기 위해 권력자들은 일부다처를 허용하며 첩을 두기도 했죠.이러한 일본의 연애·혼인 풍습 속에서, 아주 먼 옛날 조몬 시대는 어땠을까요?오늘은 조몬인의 삶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다만 이

  •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노예 해방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국시대에는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의 재산이 약탈당했고, 저항하면 살해되었으며, 살아남더라도 노예로 팔려나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노예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도였지만, 일본에서도 수백 년 전까지는 매우 보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아시가루(足輕)는 전장에서 싸워도 영지를 받지 못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군인 무사에게 신분을 받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렇기에 아시가루들의 약탈과 난행은 묵인되었고, 그들은 적의 마을에서 금품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팔아넘기며 개인적인 이익을 챙겼습니다. 전국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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