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아시아의 역사

  • 미소년 요시츠네와 못생긴 요시츠네 —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두 명이었다?

    헤이케(平家)를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그리고 그의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는 수많은 일화에 둘러싸인 인물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요시츠네의 용모에 대한 기술이 사료에 따라 크게 달라, ‘미소년’과 ‘못생긴 남자’ 사이에서 평가가 갈린다는 것입니다. 두 명의 요시츠네 『겐페이 조스이키(源平盛衰記)』에서 요시츠네는 “피부가 희고 용모가 단정하며 거동이 우아하다”라고 칭송받으며, 『기케이키(義経記)』에서도 “눈썹이 아름답고 천하에 필적할 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요시츠네를 습격

  • 몽골 침공을 물리친 것은 '가미카제'가 아니었다!? – 문영·홍안의 역 재해석

    몽골의 일본 침공과 가미카제 전설몽골의 일본 침공(원구, 元寇)은 쿠빌라이 칸이 황제로 군림하던 원나라가 1274년 문영의 역(文永の役)과 1281년 홍안의 역(弘安の役)에 걸쳐 두 차례 감행한 침략 전략입니다.당대 세계 최강이라 평가받던 원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은 가미카제(神風), 즉 신풍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통설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미카제 외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는 학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문영의 역(1274년) – 폭풍이 아니라 화살 고갈먼저 1274년에 벌어진 문영의 역이 첫 번째 침공입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천황·정부·군부의 관계 한눈에 정리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수차례에 걸쳐 대외 전쟁을 치렀습니다. 근대사를 들여다보면 군과 군인들이 여러 차례 역사의 무대 중심에 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대 관련 글이 늘어나면서, 군과 정치의 관계를 먼저 짚고 넘어가면 전쟁 관련 사건을 훨씬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 이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대일본제국 헌법 아래 천황의 권한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태정관(太政官) 제도가 있었지만, 각지에서 자유민권운동과 의회 설립 운동이 일어난 뒤 1885년(메이지 18년)에 마침내 내각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내각

  • 혼노지의 변은 아케치 미츠히데의 단독 범행이었다!?

    1580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혼간지를 항복시키며 길었던 혼간지 공방전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같은 해, 혼간지 공격을 맡았던 중신 사쿠마 노부모리 부자는 뚜렷한 공적 없이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그때 노부나가가 사쿠마 부자에게 보낸 것이 바로 19개조로 된 질책장입니다. 그 내용 일부를 현대어로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사쿠마 노부모리 부자는 5년 동안 덴노지 진성에 머물며 혼간지 공격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당연하다.먼저 탄바국에서의 아케치 미츠히데의 무공은 눈부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출병 때도 노예를 풀어주었을까? 임진왜란의 숨은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 문록의 역(임진왜란)과 1598년 게이초의 역(정유재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로 파견했습니다. 이른바 조선 출병은 흔히 히데요시의 팽창욕에서 비롯된 돌발적인 폭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치밀한 준비가 갖춰진 거대한 구상이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각 다이묘가 사실상 독립된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아무리 천하인(天下人)으로 군림했더라도, 좋아, 이제 조선으로 가자!라는 말 한마디로 스스로 전장에 나서는 다이묘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일

  • 오다 노부나가의 유명한 정책, 알고 보면 모두 '두 번째 우림'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과 전술은 시대를 한 걸음 앞서간 것으로 평가받곤 합니다.철포(화승총)의 활용, 낙시낙좌(樂市樂座), 관소(關所) 폐지, 석벽을 활용한 성곽 축조, 천수각 건립, 병농분리, 거점 이동 등 노부나가의 정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사실 이들 대부분은 다른 다이묘가 먼저 시행했던 것들이었습니다.오다 가문은 철포를 비교적 일찍 도입한 편이지만, 특별히 빠르다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케다 신겐은 총보다 기병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1555년 무렵 이미 국경 지대의 성에 철포 300정을 배치했다는 기록

  • 일본인에게 남아 있는 네안데르탈인의 피? 놀라운 유전자 연구 이야기

    네안데르탈인은 약 40만 년 전에 출현하여 약 2만 년 전쯤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인류속(호모 속)의 한 갈래입니다. 오랫동안 호모 사피엔스(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져 왔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종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 되었습니다.두 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가 워낙 커서 서로 다른 종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고, 그렇기에 혼혈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실제로 두 종 사이에 교배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우리 조상은 어떻게 일본 열도에 도착했을까?일본인

  • 러일전쟁의 무거운 부담, 폭발한 국민 불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전면전으로 인한 상처가 깊어 승전국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국력이 바닥나 있었고, 전쟁 비용으로 인한 국민의 부담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전쟁 비용 부담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 패배한 러시아 역시 혁명의 기운이 거세지면서 국내 정치가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혁명의 영향이 자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합의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한국(대한제국) 지배 이익

  • 오다 노부나가의 락이치 락자(樂市樂座),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미노국을 둘러싼 사이토 씨와 오다 씨1541년, 도키 요리나리가 사이토 도산에 의해 미노국에서 쫓겨나면서 미노는 사이토 가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역시 1547년 미노를 공격했지만, 이나바야마성의 철벽 같은 방어 앞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강화 과정에서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오다 가문 장남 노부나가의 혼약이 결정됩니다.쇼토쿠지에서 열린 노부나가와 도산의 회견에서 도산은 노부나가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동시에 언젠가 미노국은 결국 노부나가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미노

  • 낭인에서 다이묘로, 호조 소운이 키운 성하마을 오다와라

    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하극상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호조 소운(北条早雲)입니다. 그는 무명의 낭인 신분에서 출발해 사가미 지역을 손에 넣었고, 그가 개창한 고호조 씨(後北条氏)는 5대에 걸쳐 약 100년간 관동 일대를 다스렸습니다. 하극상의 또 다른 대표 주자로는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이 있습니다. 그는 승려와 기름장수로 생계를 꾸리던 무명의 처지에서 출발하여, 1554년경 미노국의 슈고 다이묘였던 도키 가문을 축출하고 다이묘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다이묘까지 올랐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뒷이야기는 크게 갈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독특한 경제 감각으로 후손에게 물려준 막대한 유산

    오래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가문의 매장 자금을 찾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오랜 세월 재정난에 시달리던 도쿠가와 막부에 숨겨진 재산이 있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그럼에도 이런 매장 보물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다름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입니다.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유산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에서 도요토미 씨를 멸망시키고 도쿠가와의 천하를 확립한 이에야스는, 이듬해인 161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남긴 유산은 실로 막대해서,

  • 소금으로 번을 살린 명군, 마쓰다이라 요리히로의 산업 진흥 이야기

    에도 시대의 통치 구조는 막번(幕藩) 체제였습니다. 막부가 중앙 집권을 담당하는 한편, 각 번은 사실상 지방 자치를 수행했는데요. 당시 번의 자치에는 오늘날과 같은 보조금이나 지방 교부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번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스스로 특산물을 육성해 충당해야 했습니다.그래서 명군(名君)이라 불리는 영주란 단순히 인품이 뛰어난 군주만이 아니라, 번의 재정을 풍요롭게 만든 군주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산유키 다카마쓰 번의 제9대 번주, 명군 마쓰다이라 요리히로에도 시대 약 260년 동안 명군이라 불린 번주는 결코 적지 않았

  • 제1차 세계대전 전쟁 특수와 쌀 폭동, 일본 경제와 사회의 대전환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는 무역적자국이었으며, 러일전쟁 이후에는 국가 재정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수출 급증으로 달성된 국제수지 개선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열강들은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느라 경제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 일본과 미국은 직접적인 전화(戰禍)를 입지 않으면서 유럽 열강에 물자를 공급하는 입장에 섰다.또한 그때까지 열강들이 치열하게 다투어 오던 중국에서의 패권 경쟁은 오히려 일본의 독점적 지배로 바뀌게 되었

  • 정한론의 고조와 메이지 일본의 해외 진출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을 둘러싼 세계 정세는 식민지 쟁탈이 본격화되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열강과 같은 방식으로 아시아 각국에 대해 강압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남북 국경의 확정 정부는 주권 국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국경 확정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류큐 왕국을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폐번치현 이후인 1872년 류큐 번을 설치했다. 류큐 왕국은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발전한 나라였다. 에도 시대 내내 명목상으로는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겼

  • 이와쿠라 사명: 메이지 유신 수뇌부의 세계 일주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정장(正使)으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 이와쿠라 사명이 조직되었습니다.사절단에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이 참여했으며, 정사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을 합쳐 총 107명에 달하는 대열이었습니다.번벌 출신의 유력 인사들이 대사와 부대사로 임명되었고, 국제 정세에 밝은 전 막신(幕臣) 같은 인재들도 함께 동행했습니다. 특히 사절단의 평균 나이가 30세에 불과했다는 점은 매우 젊은 구성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이와쿠라 사명의 결성 배경그렇

  • 메이지 신정부를 둘로 찢은 '정한론' 논쟁

    1873년(메이지 6년), 일본 외무성은 조선 문제에 관한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그 내용이란 조선의 무례함을 무력으로 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안건이 도화선이 되어 신생 메이지 정부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정한론 논쟁입니다.정한론이 조선의 무례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 무례함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정한론과 메이지 6년 정변 일본과 조선의 국교는 1811년 이후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된 뒤, 대마도의 소씨(宗氏)를 통해 조선에 접근하여 통상조약 체결을 타진했지

  • 일본 마지막 내전, 사쓰마 반란과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 유신으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구 무사(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을 하나둘씩 박탈해 나갔습니다. 또한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했던 일부 무사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새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지 않자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무사들의 불만과 사가의 난 1873년, 정한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등 정한론파 인사들이 일제히 정계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른바 메이지 6년 정변입니다

  • 부농·상인까지 참여한 일본의 국민운동, '자유민권운동'

    1874년(메이지 7년) 1월, 정한론을 내세우며 정부와 갈등을 빚어오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은 「민선의원 설립 백서(民選議員設立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민선의원 설립 백서」, 자유민권운동의 시발점 이 백서는 정부 관료들의 전횡(專橫)을 강하게 비판하고, 공의정체(公議政體)에 기반한 민선의원으로 구성된 의회의 개설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백서가 신문에 게재되자 여론은 술렁였고, 이것이 바로 자유민권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백서 제출을 계기로 자유민권과 의회

  • 전국으로 확산된 국회 개원 요구

    무사 계급의 권리를 추구하던 자유민권운동은 한때 주춤했지만,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다시 불타올라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지주와 도시 상공업자 등 지역 유력자들까지 참여시키며 운동의 기반을 넓혀 나갔습니다.정부 내분으로 촉발된 메이지 14년의 정변정치결사 애국공당은 1880년 국회기성동맹으로 개명하고, 가타오카 겐키치와 고노 히로나카 등을 대표로 하여 국회 개원 청원서를 제출하며 의회의 즉각적인 개설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탄압에 나섰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전국으로 확

  • 대일본제국헌법과 제국의회 설립

    ```html 1881년(메이지 14년) 메이지 정부는 국회 개설의 칙유를 발표하여 국민에게 의회 개설을 약속했으며, 동시에 헌법 제정 준비에 착수했습니다.같은 해 메이지 14년 정변을 거친 뒤, 188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유럽에 파견하여 각국의 헌법을 조사하게 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는 빈의 슈타인, 베를린의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에게 사사하며 군주 권한이 강한 독일(프로이센)식 헌법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귀국 후 그는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진행했습니다.독일을 본떠 만든 입헌군주제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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